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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Nov 19. 2019

44. 아이의 기침 소리

(Week 22) 참을 수 없는 속설의 무거움


논리적인 근거도 없고 정확한 유래도 모르지만 한 두 번 듣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져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 쓰게 되는 말이 있다. 교훈적인 측면이 강조된 격언이나 명언과는 달리 대개 축적된 경험을 기반으로 삶의 단편을 맛깔나게 표현해주는 말의 향연, 속설(俗說)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알록달록한 송편을 잘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믿습니다."


미국 학교에서의 에세이 시간, 아이는 한국 문화를 소개할 목적으로 긴 고민 끝에 송편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떡의 쫀득한 식감을 즐기지 않는 미국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표현은 단숨에 '추석, 가족, 도란도란' 이런 말들을 연상하게 해 준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한국의 추석이 생각났는지, 한 번도 직접 송편을 빚어본 적 없는 아이가 어디선가 들어본 이 말을 끙끙대며 영어로 옮기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특한 한편 말이 가진 전염성이 놀랍기만 하다. 평소 말에 대해 무슨 뜻인지 따져보기를 좋아하는 아이조차 들어본 그대로 쓰는 것은 이 말이 그저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난 화목한 자리에서 주고받는 덕담이나 바람 정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속성이 없었으면 이 속설이 가진 생명력은 한층 약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떤 속설은 위로의 말이 되어 준다. 가령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은 첫사랑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한, 혹은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핑곗거리를 만들고는 그 마음을 보듬어준다.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도, 조금은 가라앉은 마음을 삭힐때 쯤 '그때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게 아니었는데'라고 생각을 하노라면 어느새 잘못은 내가 아닌 돌담길에게로 넘어가 버린다. 법원이 있던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선 지 이미 오래지만 여전히 이 말은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아픔을 맞이할 때, 때로는 논리적이지 않은 말이 위로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비록 가벼운 속설일지라도 가까운 지인들 간에, 특히나 어떤 경험을 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 간에 그저 가볍지만은 않게 사용되기도 한다. '다리 떨면 복 달아난다'라는 말은 그저 자리가 흔들리기에 산만하게 굴지 말라는 암묵적인 부탁일 수도 있지만, 하필이면 최근 사업에 실패하거나 승진 심사에서 누락된 친구로부터 그 말을 듣게 된다면 사뭇 숙연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불가피하니 어서 빈 잔을 채워줘야 할 것이다. 별생각 없이 사용되던 말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후회, 탄식, 걱정, 위로, 동정 등 수많은 감정을 함축하기에 가벼운 말 한마디가 때로는 온 세상을 천근만근 무겁게 짓누른다.




엄마는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속설 하나에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반응하신다.




가끔 통화를 할 때면 나는 잘 지낸다 안심시켜 드리려는 의도로 아픈 데 없다, 모두들 건강히 잘 있다 말씀드리는데, 엄마는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며 한 칼에 잘라버리신다. 얼마 전 잠시 한국으로 돌아갔을 당시에도 엄마를 뵙고는 다들 아픈 데 없이 잘 지내왔다는 식의 진부한 안부 인사를 드렸지만, 엄마는 또다시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셨다. 그냥 인사치레인데 무섭게 왜 그러시냐 여쭤봐도 그저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만을 반복하시니 나로서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실마리를 찾기 시작한 건 얼마 전 일이다. 밤낮으로 20도를 넘나드는 일교차 속에 아이는 부쩍 기침이 잦아져 일주일이 지나도록 약을 먹어도 푹 쉬어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무능한 부모라 해줄 수 있는 일도, 대신 아파줄 수도 없는 노릇에 답답하기만 하던 그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 사는 일에는 늘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몇 달째 무탈하게 너무 잘 지내오기만 한 건가. 일주일 전 엄마와 통화할 당시에도 또다시 습관적으로, 다들 아픈 데 없이 아주 잘 지내니 걱정 마시라 말씀드렸더니 줄곧 좋기만 한 기운을 자랑처럼 떠들고 다닌 나를 시셈하듯 어디선가 사악한 마수가 뻗친 것일까. 엄마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은 혹시 화목한 우리 가정에 행여라도 불운이 깃들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정확히 말씀을 해주시질 않으니 여전히 알아낼 도리가 없다. 찾아봐도 그런 말은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과거 어디선가 그런 비슷한 류의 속설을 들으셨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병상에 오래 누워계셨던 아빠의 병간호를 하며 느끼셨을 무기력, 걱정, 불안함이 축적되어 그런 말에 대한 조심성이 습관처럼 몸에 밴 게 아닐까 생각이 드니 그런 마음조차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내가 다리를 떨어서 복이 달아났나,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자꾸 안좋은 일이 생기나 하는 근거 없는 자책감, 그걸 아들이 또 느낄까 걱정이 되셨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엄마만의 속설이 아닌, 한 세대를 건너와 나에게 전이된 속설이 되어버렸다. 조심해야 할 말이 하나 늘었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렇게 살아오신 세월을 존중하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그런 알 수 없는 속설로 불안한 속마음을 내비치실 때면, 그저 걱정하시는 마음이겠거니 감사하게 받아들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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