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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Nov 15. 2019

43. 주부의 자존감

(Week 21) 보여지는 나, 바라보는 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 맞는 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는 그 말을 주부가 했을 것 같지는 않다. No offense.




십여 년 전 사내 IT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할 때였다. 투자 시스템의 개발 및 유지보수 업무, 우리 부서 없이는 회사가 돌아갈 수 없다고 애써 강조하는 부서장과는 달리 부서원들의 사기는 높지 않았다. 잘해봐야 현상유지가 본전인 조직,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어려운 조직,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식은땀 흘리며 자발적 야근을 강요당하는 조직의 특성은 가사 노동과 유사한 점이 많아 보였다.


한껏 가라앉은 기운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일하기를 1년, 하나의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즈음 부서장과의 면담 일정이 잡혔다. 좀 더 실질적인 투자 업무, 힘들어도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2년차 풋내기의 호소에 벼락같은 호통을 예상했건만, 부서장께서는 그저 허허실실 웃으시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겠다며, 기회를 보자는 말씀만을 하시니 비로소 그것이 부서의 자존감이자 역린을 쿡쿡 찔러댄 댄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후 몇 년간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한 뒤에야 지위나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빛을 뿜어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못 견디게 싫었던 것일까. 빛을 쫓아 떠돌던 내 몸에선, 정작 나에게선 빛이 나고 있었던 걸까. 그걸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기나 하고 떠들어댄 걸까.




아직은 보편적이지 않은 남자 회사원의 휴직.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 알게 된 분들은 흔치 않은 경우에 호기심을 내비치며, 평소 무얼 하며 지내는지 궁금해하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몇 분의 몇 초, 그 사이 조속히 일상을 재구성한 나는 에세이나 소설 따위의 글을 쓰고,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며, 골프를 치고 테니스를 배우는 나를 소개한다.


그럴 때면 어딘가 떳떳하지 못한 내 표정 뒤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드는데, 은희경 작가님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그것은 '보여지는 나'에 대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일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밥, 설거지, 빨래, 청소를 하는 나는 왜 감췄는지 집요하게 물어보는 눈빛이다.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집안일. 나조차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나의 자존감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그에 대한 질문이고 답을 달라는 기다림이다.




결국 또다시 자존감의 일이다. 흔들리는 세상에 서 있는 것도, 그 세상을 흔드는 것도 흔들리는 것도 결국은 나라는 존재이다.




휴직과 함께 심해진 감정의 기복. 쉽사리 잡히지 않는 무게 중심을 탓하며 그 원인으로 낮은 자존감을 지목했건만 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휘청거린다. 세상을 떠받치는 부모상(像), 최고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노라 자기만족의 탈을 씌워보려 해도 자꾸만 벗겨지고는 그 안의 민낯이 샅샅이 드러난다. 그럭저럭 재미있다며, 때로는 보람 있다 말하지만서도 어떤 날에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좋지가 않다고, 실핏줄이 달아올라 쓰라리다 표정 짓는다.


다만 다행인 것은 자꾸 들여다보니 그 안에 애써 거부하던 내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쉽게 웃는 것도, 실컷 할퀴어대던 손톱을 내밀며 다시 손잡자는 것도 나란다. 진솔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과시적인 글로 허세를 부리는 것도 나란다. 조급해 말고 걸어가라며 타이르는 것도, 안절부절못해 뛰어가다 넘어지는 것도 나란다. 인생 별거 있냐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도, 돌아서선 몰래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도 나란다. 그게 다 나라고 한다.


찾고자 한 자존감 대신 감춰둔 속살만 잔뜩 드러나니 이것조차 시간이 허락해 준 선물일까.




주부의 자존감, 몇 달을 고민해봐도 몇 년을 더 고민해봤자 나는 그것을 모를 것 같다. 남들 글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그나마 한 가지 어렴풋이 이해되는 건, 어떻게든 이겨낸 게 아니라 숨죽여 참고 계시던 것이었다. 그걸 알게 되어 다행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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