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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Aug 18. 2021

병원에서

만약에...


잠시 입원하게 되었다. 잠시라고 말하는 데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이 영원 같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기 위한 마음가짐 일지 모르지만. 전례 업는 무기력함에 맞서 내 삶의 주체는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기라도 하고픈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황상 나는 잠시 입원해 있다.


불행해진 나를 지배한 키워드는 '만약에'였다. 만약에 그날 아침 늦잠을 자서 운동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마침 새벽까지 EPL 개막식을 보며 손흥민의 시즌 첫 골을 감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불행히도 내겐 휴일일수록 더더욱 게으르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어, 예정대로 아침 운동을 나가야만 했다. 첫 번째 만약에, 실패.


만약에 그날 아침 컨디션이 좋지 않았더라면. 잠을 몇 시간 못 잤음에도 입추를 지나 선선해진 아침 공기는 나의 페달링을 가볍게, 아주 경쾌하게 만들어 주었고 때마침 장착한 속도계는 이제 초급자가 아닌 중급자 수준에 도달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최고의 컨디션, 부인할 수 없는 기분 좋은 라이딩이었다. 두 반째 만약에도, 실패.


만약에 그날 아침 한 무리의 라이더들이 나를 거만하게 앞지르지 않았더라면. 지나갈게요, 한마디 툭 던지고는 4명이나 아슬아슬 스쳐 지나가니 오기가 발동한다. 그리고 하필이면 좋은 컨디션. 뒤쫓기에 무리가 없다. 그렇게 그 무리에 붙어 십여분 기분 좋게 달렸으니 세 번째 만약에, 또다시 실패.


만약에 그날 아침 간격을 조금만 유지하였더라면. 문과생인 나는 아쉽게도 뉴턴의 운동 법칙을 깡그리 무시하며 달렸고, 후발주자였던 나는 앞선 라이더의 브레이크에 뒤늦게 반응하여 급정지, 그리고 하늘을 날았다. 세기말 카메라 워킹마냥 세상이 뒤죽박죽 되더니 머리가 쿵, 어깨가 쿵. 반응할 수 없어 네 번째 만약에도 여지없이, 실패.




그렇게 나는 잠시 입원하게 되었다. 얼굴이 긁혀 살점이 나가고, 쇄골뼈가 골절되고,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만약에를 되뇌던 나는 마침내 뜻밖의 쓸모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누군가를 위로하는 데 이만한 게 없었다. 만약에 내가 안전모를 쓰지 않았더라면, 죽었을지 모른다. 만약에 목이 꺾였더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을지 모른다. 만약에 얼굴을 정면을 부딪혔다면, 코뼈가 부러지거나 턱 또는 이가 나갔을지 모른다. 만약에 손목을 짚었더라면, 당분간 회사 복귀는 꿈도 못 꿨을지 모른다.


정 반대의 수많은 만약에를 상상한 나는,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낙상을 기억하는 나는, 스스로 긍정의 신으로 빙의되어 주위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아내, 친구, 직장 동료. 그리고 어머니,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배웠던가. 내 잘못인데, 이만하면 천운이라고. 하염없이 우시지만 그래도 만약에 가 통하기는 하는가 보다. 하루하루 기운을 차리시고는 이만하길 다행이다 위로하신다.


약 48시간 동안 나의 만약에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나를 승리자로 만들어 주는 듯하였다. 마음먹기 달렸군. 며칠만 버티고 돌아가자 집으로. 더 이상의 만약에는 불필요한 듯하였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지막 만약에가 등장한다.




베트남 청년, 나이는 22세. 이름은 모르지만 끝 자는 응 또는 엉. 한국말은 못 한다. 네,라고 하지만 분명 저건 그냥 네, 다. 알아듣지 못한 네, 기계적인 네, 습관적인 그냥 네, 다.


옆 침대에 배정되어 외국인인가 하고 흘깃 보다가, 긍정의 신이 된 나는 그를 돕기로 한다. 코로나로 수저가 제공되지 않는 식사 시간에 네, 를 말하는 그에게 나는 여분의 일회용 젓가락을 제공하였고 이름의 끝자가 응 또는 엉인 22세 베트남 청년은 고개를 끄덕, 한다. 엑스레이 촬영 날 손에 쥐고만 있는 접수증을 낚아채서 접수창구에 제출해 주었을 때도 그는 고개를 끄덕, 한다. 네, 하고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 한다.


영원 같은 어느 고요한 오후, 옆 자리에서 소란이 들린다. 치료 거부, 강제 퇴원, 이런 말이 들려오고 이름의 끝 자가 응 또는 엉인 22세 베트남 청년은 연신 네, 를 남발한다.


"환자분이 치료 거부하신 거예요, 맞죠?"

"네."


"이러고 나가시면 영영 손가락 못쓸 수도 있어요, 이해하셨죠?"

"네."


"저희는 충분히 설명해 드렸고, 나중에 이의 제기하시면 안 됩니다."

"네."


"지금 제가 하는 말 다 알아듣기는 하는 거죠?"

"네."


"진짜 안되는데, 마지막으로 산소치료 한번 받고 나가세요."

"네."


커튼 너머 또렷이 들이는 대화에 관심이 쏠렸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상상할 뿐. 단지 치료비가 없는 걸까? 도와줘야 하나? 혹시 불법 취업자라 강제 추방당할 위험이 있는 걸까? 이러고 나가면 정말 한 손가락을 못쓰는 게 아닐까?


그렇게 나는 병실이 잠잠히 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는 모든 사태가 정리된 뒤에야 커튼을 젖혀 그의 빈자리를 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도 없다. 22세의 베트남 청년, 이름이 응 또는 엉으로 끝난, 그는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빈자리에서 그의 끄덕임이 미세한 전율을 만들어낸다. 만약에 그에게 일회용 젓가락을 주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의 접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커튼을 젖혀 그의 퇴원을 만류했다라면, 만약에 그가 도와달라 말했더라면.


어느 말 만약에.


길을 가다 손가락이 하나 없는 동남아 태생으로 보이는 청년을 마주하게 된다면. 누군가 그의 이름을 무슨무슨 응 또는 엉, 이라고 부른다면. 나와 마주친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48시간 만에 나는 또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잠시 입원해 있다. 이 하얀 공간에서 하얀 옷을 입은 나는 남들처럼 시무룩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보려다가 시선이 마주칠만하면 휙 돌려 아무도 없는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잠시 입원한 나는, 다시 테이프를 감고는 만약에를 시작한다.


만약에 그날 아침,

운동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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