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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다 Jul 21. 2021

Can You Swim?


세상에는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분법이 가능해지는 여름이 드디어 온 것이죠. 휴양지에 가거나, 물에 들어갈 수 있는 온도가 됐는데, 물이 있을 때, 이 이분법은 힘을 발휘합니다.



집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바다가 있습니다. 야트막한 바다처럼 보이지만 5m 정도 나가면 키를 넘어 꼬르르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다는 깊이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지요. 얕은 바다는 바닥의 모래나, 바위의 색을 보고, 노랗거나 검은색이 보이지만, 그보다 깊은 파랑 속은 가보면 그제야 아 여기 발이 닿지 않는구나 알게 되는 거잖아요. 거기 가본 적은 없습니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얘기해줘서 아는 거예요. 여기 오면 발이 닿지 않아, 라고요. 저는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살아가기 위해 걸음마를 배우는 일은 대부분 어린 시절 하게 되지만, 수영을 할 줄 몰라도 세상 사는 데 별다른 불편함은 없습니다. 만약 홍수가 크게 난다면, 수영을 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그런 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요. 김애란 작가의 소설 '물속 골리앗'이었는데, 이 사람 여전히 잘 쓰고 있구나, 싶었는데요.) 아직까지는 그런 자연재해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아,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게 아주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놀려면 수영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은 10년 전 즈음에 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갔다가 첨벙첨벙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 여기서 저런 것을 하는 게 기쁨이겠구나, 싶어지며 결국 수영을 해야 잘 놀 수 있겠구나 싶어, 수영을 배워야지 했지만, 계속 도시에 사는 동안은 수영장이 근처에 없거나, 의지가 부족해 수영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집 앞 5분 거리에 수영할 수 있는 바다가 있어, 아침마다 구명조끼까지 장착하고 수영을 배우러 나가기 시작한 지 일주일즈음 됐습니다. 그리고 해수욕장이 본격적으로 개장하며 어려움에 처해 있지요. 동네 주민들은 해수욕장 개장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매일 드나들던 바다의 출입구가 한 곳으로 정해지고, 사람이 많아지고, 어떤 규칙과 제한이 생기는 일이, 이미 다른 데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반갑지 않은 법이지요.



그러나 요즘 바다를 보면, 이 바다는 너무 아름다워서, 누군가랑 공유하는 게 맞는 거겠다, 우리 동네 주민들끼리만 좋아할 수 없구나 싶게, 여름이 되자 바다는 더욱 빛납니다. 이게 참 신기합니다. 왜 여름 바다는 이렇게 하염없이 아름다운 걸까. 날 보러 오라는 건가 싶게, 바다색이 매일 다르긴 한데, 최근 바다색이 가장 예쁩니다. 강릉이 코로나 4단계 도시가 되며, 사실 방문하기 쉽지 않지만,(방문해도 식당이나 카페 가기도 불편하고 그러니까요.) 인간들의 삶이 그러거나 말거나 강릉 바다는 요즘 가장 아름답습니다. 작렬하는 태양빛과 하늘의 파랑 덕분에 바다색이 아름답고 그래서 그 작렬하는 태양빛을 맞으며 그냥 서있기만 해도 땀이 나지만, 하늘이랑 바다가 그리는 빛이 최근 가장 예쁘구나, 종종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름에 바다로 가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수영을 할 줄 아시나요? 수영을 언제 배우셨어요? 걸어야 밥도 먹고 벌고 할 수 있기에, 대부분 걸음을 배우지만, 수영은 배우지 않습니다. 어릴 때 수영을 배울 수 있었다면, 부르주아였을 수 있겠구나, 그게 요새 생각입니다. 수영은 어업이나 수산업에는 생존을 위한 필수이지만, 바닷가 사는 사람들에게는 좀 더 익숙한 일일 수 있으나, 도시민들에게 수영은 어쩌다 하게 되는 레저입니다. 이 레저를 위해 시간과 돈을 낼 만큼의 여유가 없다면, 수영을 배울 수 없는 것이죠. 만약 어릴 때 수영을 배웠다면 집안이 잘 살았거나, 바닷가에 살았거나, 하기 십상이겠구나를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도시민이던 친구들은 대부분 2, 30대 경제적 능력을 어느 정도 채우고 나서, 약간의 여유가 생긴 뒤,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같이 나가서 아침 수영을 하고 회사로 출근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지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뭐였을까요. 예전에 회사 다니며 본 책 중에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 표지가 수영장 바닥에서 발을 떼는 모습이었지요.



저는 구명조끼를 입고, 이제 막 바다에 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가끔 튜브는 탔는데, 바다에서 수영을 못 하면서, 혼자 튜브를 타는 것은 위험합니다. 누군가 지켜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해수욕장을 보면 아이들이 튜브를 탑니다. 지켜줄 부모가 있는 아이들인 것이죠.



바다의 깊이라는 것은 이상하게 사람을 무섭게 해서, 한 발 떼는 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습니다. 수영을 가르쳐주는 친구들이 내가 널 구해줄게, 설마 내가 너를 죽이겠니, 하면 그 말에 충분히 동의하는데도 발이 떼어지지 않습니다. 발을 떼고 몸에 힘을 빼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절대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죠. 그러다 문득, 아 나는 평생 몸에 엄청 힘을 꽉 주고 살았네, 알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둥실 떠있다보니, 몸에 힘이 빠지고 이렇게 중력과 상관없이 뜨게 되다가, 아 나는 평생 몸에 힘을 꽉 주고 살았네, 특히 다리에 힘을 줬구나, 그래서 다리가 자주 아프구나 처음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몸에 힘을 빼고 어딘가에 나를 맡기지를 못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겨우 바다에 누울 수 있게 됐지만, 앞으로 몸을 기울여 발을 떼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합니다. 몸이 물에 둥실 뜨는 순간, 실은 내 발 아래 깊이는 깊으나 얕으나 소용 없는 것이며, 실제로는 발이 닿는 데에 서있는 건데도 발이 떼지지 않습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아니, 그냥 몸에 힘을 빼면 된다고, 발을 떼라고 하는데도 절대 되지 않는 것이죠.



결국 구명조끼를 입고 엎드리지는 못하고, 발을 떼서 물속에 떠 있다 어느 정도 그 기분이 적응이 되면 겨우 엎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발이 닿지 않고 몸에 힘을 뺀 그 느낌이 이상해 금세 발을 댈 곳을 찾고 맙니다. 그리고 아 다행이다, 하고, 다시 엎드려보고, 금세 발을 땅에 내려보고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수영이라기보다는 물과 친해지기 같은 것인데, 이러다 여름이 다 가면 어쩌나 싶지만, 그래도 한 발 시도는 중요하므로, 그냥 좋아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가르치는 입장에서야, 진도가 늠흐 안 나가서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 같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요. 해변으로부터 1m 나온 바다에서 망망대해를 떠올리며 머릿속으로는 파이이야기의 파이가 되는 그런 인간이라, 매일 몸에 힘을 빼는 연습 중에 있습니다.



생은 자꾸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뭐냐고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몸에 힘을 빼고 물속에 둥실둥실 뜨듯이 떠가다 조금 다리에 힘을 주고 걷기도 하고, 그러다 힘이 나면 달리기도 하고, 그런 것일까, 하면서요.


어쨌든 물속에서 바라보면 바다는 엄청 아름답습니다. 이 물결이 그려내는 그림은 정말 그 어떤 예술가도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구나 싶어, 그냥 거기서 그걸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좋다, 수영을 잘 못 배워도 어쩔 수 없지, 언젠가 나아지면 좋지만 아니면야 하면서, 물속에서 바라보는 물결에 반한 채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몸에 힘을 꽉 주고 살 수 밖에 없는 게 대부분이지요. 어쩔 수 없지요. 여름은 그런 몸에 힘을 풀라고 있는 것도 같다가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걷다 보면 땀이 뻘뻘 나고, 이 여름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떠올리면 덥다고 짜증내지 말아야지, 하며, 여름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은 조금 슬프고, 또 예쁘고, 그런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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