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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부부 Oct 17. 2021

아가, 조금만 더 있다 가지….

아내, B 이야기 - 유산


    TV 속 육아프로그램을 통해 소위 랜선 이모들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 나는 육아에 대한 환상을 키우며 친한 회사 선배의 임신 이야기를 눈을 반짝이며 듣곤 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바로 ‘아기 심장 소리를 듣던 순간’이었다. 아기라고 상상하면 콩닥콩닥 심장도 귀엽게 뛸 것 같은데 아니 웬걸 무슨 기차가 굉음을 내고 지나가듯이 ‘쿵쾅쿵쾅쿵쾅’하고 우렁찬 심장 소리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니, 선배. 얘는 남자가 분명해요. 어떻게 심장이 이렇게 우렁차게 뛰지?”

그때 알았다. ‘아기들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튼튼한 존재’라는 걸…….   

  

   남편과 함께 아기 심장 소리를 들으러 간 날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심장 소리의 진실을 남편에게는 비밀로 하고 말이다. 기다림 끝에 진료실로 안내받고, 그간 혼자만 들어가던 초음파실에 남편도 함께 들어갔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곧이어 마주할 초음파 화면에 들떠있었다.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바로 '여기 보이시죠?' 말을 걸었을 의사 선생님께서 한참을 말없이 초음파 기계의 위치를 바꿔가며 화면만 바라보셨다. 아기의 심장이 아니라 내 심장이 ‘쿵쾅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날 진료실에서 우리는 아기가 잘 자라지 않아서 유산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산’이라는 단어가 우리 부부에게 어떤 아픔일지 잘 안다는 듯 의사 선생님은 최대한 그 단어를 에둘러 표현하셨다. 다음 주에 다시 보고, 그때까지 정상적인 발달을 보여준다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한 스푼 넣어서 말이다. 구름 위를 걷는 심정으로 들떠서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는데 이상하게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내 손목에는 입덧 방지용 팔찌가 아직 채워져 있었고, 나는 500m 앞 정육점 냄새에 벌써 역겨움이 밀려왔다. 내 몸은 분명 아기가 자라고 있는 몸이었다. 

    

    우리 부부는 1%가 안 될지도 모르는 작은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첫 피검사 수치도 정상 범주에서 조금 아래에 있었으니 그냥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성장하는 아이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이유 없이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고 이 증상, 저 증상을 말해가며 넘쳐났던 우리 사이의 대화는 뚝 끊겼다. 그동안은 하루하루가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아쉬웠는데 다시 시간은 지독하게도 흐르지 않았다. 우리 아기가 내 안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 와중에 너무 빨리 밝혀버린 임신 소식 때문에 몇몇 회사 동료들은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울컥하는 내 모습을 감격에 겨운 예비 엄마의 행복으로 이해했을까. 나 역시 어렵게 받은 ‘엄마’라는 이름표를 쉽게 떼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슬픈 예감을 틀리지 않았다. 마지막 초음파 속에서는 반짝이는 심장의 모습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더는 반짝일 힘도 없는데, 마지막 힘을 다해 내게 반짝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최종진단을 내리기 전에 나는 내게 내려질 진단을 이미 알 수 있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 남은 시간은 이틀도 없었다. 스케줄을 확인하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틀 뒤로 수술 날짜를 잡고 전날 먹을 약 처방도 함께 내려주셨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나의 비극을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다. 결과를 듣고 출근길에 오른 나는 빈자리가 많은 지하철 안이었지만 열리지 않는 쪽 문을 바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게 흐느낌인지 입덧으로 인한 구역질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비극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미리 축하 인사를 건넸던 그들의 친절함을 후회하는 것도 같았다. 어색하게 위로를 건네는 그들에게 나는 죄송하다고 해야 할지, 괜찮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가장 힘든 것은 기뻐하셨던 부모님들께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부모님께 이 사실을 전달하기로 했다.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던 나는 엄마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아기가 잘 안자라고 있어요. 세상에 태어나기에는 너무 약하대요. 이제 보내줘야 한다네요. 그래서 나 이틀 뒤에 수술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괜찮니? 엄마가 올라갈게!’


    나로 인해 속상해할 엄마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극구 올라오겠다는 엄마를 말렸지만 결국 엄마는 수술 전날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들고 우리 집으로 올라왔다. 현관문을 열기 무섭게 엄마는 두 팔로 말없이 나를 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렇게 다시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딸’을 연기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엄마가 챙겨주는 저녁밥을 함께 먹는 것을 끝으로 아기와 내가 함 께하는 시간은 끝이 났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시간에 맞춰 유산을 유발하는 약(싸이토텍)을 먹었다. 아주 작은 6각형 모양의 알약 2개였다. 쉽게 잠이 올 리가 없었지만, 침대에 누웠고 눈을 감고 잠든 남편의 숨소리에 맞춰 아직은 내 말을 들을 수도 없는 아기에게 한마디씩 말을 걸었다.    

 

‘아가…. 조금만 더 있다 가지. 아직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얼핏 잠이 들었던 나는 묵직한 복부의 통증에 잠에서 깨어 화장실로 향했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던 어마어마한 양의 출혈과 함께 몸속에서 핏덩어리가 빠져나왔다. 괜찮아진 듯해서 침대로 향했다가 다시 복통으로 화장실로 왔다 갔다 하기를 몇 번, 마지막에는 침대에서 화장실로 기어가서 변기 앞 앉아 구토했다. 내 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아픔을 느끼면서도 혹시 8 주차 아기도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닐까. 마지막 느낌이 고통이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이미 기진맥진한 채 엄마, 남편의 손을 잡고 M병원으로 향했다. 약물로 완전히 태아조직이 배출된 경우 수술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초음파 결과 나는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고 했다. 어젯밤 그렇게 많은 핏덩어리를 보내고도 아직도 태아조직이 남아 있다니…. '이렇게 많이 자란 아이인데 정말 보내야 했냐고 진단이 잘못된 게 아니냐'고 억지를 부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시술 때와 달리 ‘수술실’이라고 적힌 문 앞으로 안내받았다. 모든 절차는 시험관 시술의 채취 과정과 비슷했다. 단 이번에는 오동통한 아기의 발도, 다정한 간호사 선생님의 안내 멘트도 없었다. 더 서늘한 수술대 위로 안내 받고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훅 들어온 수면 마취 끝에 수술은 끝이 났다. 마취 때문인지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마치 나의 불행과 한걸음 떨어져 있고 싶다는 듯 정적이 흐르는 대기실과 싸늘한 공기는 내 몸을 떨리게 했다. 이제 나는 정말 임산부가 아니라는 생각, 문밖을 나가면 엄마와 남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남은 눈물을 이 자리에서 다 흘리고 나가겠다는 각오로 눈물을 흘렸다.

     

욕심이었지만 나는 아기가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랬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기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해주고싶었다. 언젠가 더 튼튼한 모습으로 우리 다시 만나자. 고마웠어.


    집에 돌아와 다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엄마는 이미 없었다. 엄마가 있던 자리에는 곰탕이 한가득 남아있었다. 이 곰탕을 다 먹을 수는 있을까 걱정이 될 만큼 둘이 먹기엔 턱도 없이 많은 양이었다. 딱 엄마의 곰탕을 다 먹을 때까지만 슬퍼하자 각오하며 조금씩 꺼내놓았던 입덧 팔찌, 배아 사진, 초음파사진 등을 상자에 담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곰탕이 너무 적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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