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아내는 본의 아니게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피곤할텐데 조금만 더 자는 게 어떻냐고 말해봐도 ‘그냥 이상하게 눈이 떠진다.’고 했다. 어느새 가을이 되어 아침 공기는 서늘했고 나는 언제나처럼 뒤늦게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뒤 식탁에 앉았다. 평소엔 부엌과 식탁을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아내가 이 날따라 의자에 앉아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게 왔구나...’
나는 피할 수 없는 테스트기 OX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아내는 피검사 날짜가 다가오면 늘 애매~한 테스트기를 보여주며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한 줄,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관심법(?)으로 보면 또 한 줄이 보일랑 말랑한 테스트기가 내 손에 들려졌다. 나는 이번에도 테스트기를 흘겨보며 ‘두 줄아 제발 보여라!!’외쳤지만 사실 내 눈에는 한 줄에 가깝게 보였다.
“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럴 때는 어떤 대답을 해야 아내가 만족할 수 있을까 수차례 고민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테스트기처럼 애매한 대답뿐이었다. 괜한 설레발은 더 큰 좌절을 부르고, 단호한 대답은 무심한 남편이라는 오해를 사기에 딱 이었다. 부디 내일은 정답이 보이는 쉬운 문제가 아침 식탁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출근길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정말 나는 두줄이 보이는 테스트기를 아침식탁에서 만나게 되었다.
매일아침 나는 아내에게 받은 테스트기를 공책에 가지런히 붙였다.
얼리 테스트기에서 보였던 두 줄이 스틱형 일반 테스트기에도 나타났고 매일매일의 결과를 노트에 나란히 붙이는 것은 나의 아침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매일 조금씩 굵어지고 선명해지는 빨간 줄을 보고 있으니 ‘자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라는 부모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줄이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자궁외임신을 통해 알고 있었던 터라 우리 부부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1차 피검사를 앞두고 아내의 불안은 커져갔다. 어느 날은 어제보다 선이 연해진 것 같다며 공책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했다. 나라고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 눈에는 한참은 더 진해진 것 같다.’는 선의의 거짓말로 아내의 불안을 달랬다.
다행히 피검사 수치는 정상범위 안에 들었다. 아내는 75는 너무 낮은 것 같기도 하다며 여전히 불안해했지만 나는 정상 임신 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마냥 기뻐할 정상 수치를 받고도 불안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임신 준비가 길어지고 아는 게 많아질수록 마냥 행복해할 수만은 없다는 점이 참 안타까웠다. 가까스로 찾아온 이 행복이 날아갈까 걱정하는 마음도 간절함과 비례해 함께 커졌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세포 단계에 있던 배아들은 곧 초음파의 아기집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때는 가을의 한복판이었고, 우리가 산모 수첩을 받은 바로 몇일 뒤는 당장 추석 명절이었다. 우리 집은 명절 제사를 지내서 매번 명절 전날부터 내려갔었지만, 이번만큼은 부모님께 임신 소식을 미리 말씀드려서 내려가지 말자고 아내에게 제안했다. 아내는 어른들이 우리를 유난스럽게 생각하면 어쩌냐, 아직 너무 이르다며 내켜 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매년 다가올 명절보다는 아이와 아내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나는 먼저 가족 카톡방에 두 줄이 진하게 나온 테스트기 사진을 보냈고 읽음표시가 뜨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부지. 할머니 할아버지 될 마음의 준비가 되셨어요?”
아내의 걱정은 기우였다. 처음에는 이게 뭐냐고 얼떨떨해하던 부모님께서는 너무나 좋아하시며 먼저 이번 명절에는 집에서 안정을 취하라고 말하셨다. 붙임성이 좋은 엄마가 추석 명절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이제 나도 할머니가 되었다며 자랑하실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줌마로 불리는 건 여전히 싫다던 엄마가 할머니 소리를 이렇게 반가워할 줄이야....’ 나는 우리의 임신이 불러오는 마법 같은 행복이 모두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시기의 나는 카카오톡메신저보다 자주 이 어플에 들어가곤 했다.
행복한 순간을 한시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는 부부가 공동으로 기록할 수 있는 임신 다이어리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해서 280일 뒤 태어날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기록했다. 메인 화면으로 들어가면 주수에 맞게 아기 모양이 보이는 어플리케이션이었는데 들어갈 때마다 멘트가 바뀌고 그 시기에 어떤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쏠쏠한 팁도 줘서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어플리케이션에 접속해 이 시기에 우리 아기가 얼마나 자랐을지, 이 시기에 우리 아내는 어떤 증상이 나타날 수 있을지 확인하곤 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나봐요.’라는 문구가 캐릭터의 말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날에는 그 화면을 캡쳐해서 아내에게 보내며 태어나기도 전에 이런 걸 아는 걸 보니 천재인 게 분명하다며 말도 안 되는 호들갑도 떨었다.
어플리케이션에서 ‘이 시기 엄마는 입덧이 나타날 수 있어요’라는 문구가 보일 때쯤 아내는 정말 급격하게 입덧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내와 가능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 노력했다. 아내가 해줬던 것처럼 식탁을 가득 채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설프게 저녁 반찬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최대한 집 안에서 냄새날 구멍을 없애기 위해 화장실 청소도 더 자주 했다. 늘 우리집 대소사는 아내가 먼저 챙겼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태아보험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설계사님께 관련 자료도 받아보고 유튜브에서 필요한 내역과 불필요한 내역을 비교한 영상도 보며 아내에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어른이 되고 월급쟁이의 삶을 살게 된 이후 매일이 바빴지만, 새롭다는 생각이 들지 았았다. 하지만 아빠가 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하루하루가 아이와 아내를 위해 해주고 싶은 일로 가득차서 매일이 새롭고 또 설렜다. 시간이 2배로 흘러 하루 빨리 우리 아이를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 가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분주했지만 그해 가을은 내겐 너무 완벽한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