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직전에는 생전의 기억 중 가장 소중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라는 말이 있다. 자궁외임신 이후 4번의 시술을 하는 동안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가을이 되었고 나는 그해 가을, 생의 마지막까지 가져가고 싶은 기억 중 하나를 쌓게 되었다.
첫 시험관 시술의 아픔이 봉긋봉긋 귀여운 배아의 사진으로 무뎌지고, 하루 이틀이 지나 어느덧 얼리 테스트기가 반응하는 시간이 되었다. 시술 후 언제나 그랬듯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테스트기는 대략 5분 정도 후에 정확한 결과를 보여주는데 나는 그 시간 동안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혹여나 너무 빨리 낙담하게 될까 나는 테스트기가 반응을 보일 동안 집안 곳곳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밤새 쌓인 탁한 공기를 순환시켰다. 커피 대신 마시기 시작한 무카페인 차를 위한 따뜻한 물도 끓였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의연하게 받아들이리라’ 다짐했지만, 그 다짐을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5분에 5분을 더해서 10분의 시간을 간신히 때운 뒤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테스트기를 잡아 들고 질끈 감은 두 눈을 뜨자 진한 한 줄, 그리고 그 옆에 아주 연한 또 하나의 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을 비벼봐도 각도를 달리해봐도 내겐 분명 두 줄이었다. 두 줄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남편이 일어나는 시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은 남편에게 표정 관리를 하며 무심한 듯 테스트기를 건넸다.
“오빠, 이거 나만 보이는 매직아이야?” “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두 줄이 처음은 아닌 데다 아직은 너무 흐린 줄이었기에 남편은 나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단박에 두 줄이라는 반응을 해주지 않는 남편의 반응에 섭섭함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래, 아닐 수도 있으니까 괜히 설레발 치지 말자’하며 날아오르는 기분을 자제시키려 애썼다. 다음 날 아침 다행히 나의 설레발은 현실이 되었다. 테스트기는 어제보다 선명한 두 줄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번에는 남편도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우리 부부에게도 쨍하고 해 뜰 날이 찾아온 것이다.
늘 피하고 싶어 했던 피검사 날이 다가왔고 나는 이번에는 기꺼이 주삿바늘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피검사 수치는 75였다. 비임신일 때의 수치는 0이나 0.1로 너무나 확실하지만, 임신일 때의 피검사 수치는 애매하기만 했다. 간호사 선생님도 별다른 말씀 없이 일주일 뒤 예약 일정만 물어보셨다. 75라는 수치가 좋은 것인지, 정상범위에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이번에도 인터넷 카페 랜선 선배님들께 SOS를 칠수 밖에 없었다.
“1차 피검 75라는데 괜찮을까요?”
임신 4 주차일 경우 평균적인 hCG수치(임신 수치)는 10에서 750이라고 한다. 무슨 평균치가 이렇게 광범위한가 싶어 허탈한 마음은 들었지만, 75라는 숫자도 정상 범주에 들어가 있다는 데 안도감을 느꼈다. 괜한 걱정은 말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일주일을 보냈다. 5주차, 이번에는 채혈실이 아닌 진료실 안으로 안내받았다. 5주차면 대게 초음파로 아기집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오늘은 산모 수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애간장을 태우는 줄다리기는 계속됐다. 초음파상에는 분명 뭔가 보였지만 아기집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작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조금 착상이 늦으면 6 주차에 아기집을 보는 일도 많으니 상심하지 말고 피검사 후 다음 주에 다시 보자고 하셨지만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궁외임신의 악몽이 다시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속상한 마음에 남편에게 우리는 왜 이렇게 쉬운 게 없냐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과 비례해서 인터넷을 붙잡고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임신 피검사 수치’로 시작한 검색어는 ‘임신 5주차 아기집’ ‘아기집이 안 보일 때’등 다양한 검색어로 변주되어 계속 손가락을 움직이게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무렵 임신을 알리는 증상들도 조금씩 시작되었다. 늘 타고 다니던 지하철의 공기가 거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밤 12시까지 거뜬하던 눈꺼풀은 9시 반만 넘어도 감기기 시작했다. 배 한 쪽이 콕콕 쑤시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아기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참다못해 퇴근길에 집 근처에 있는 여성의원을 방문했다.
“저기 혹시...초음파로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분명 여성의원이었지만 ‘임신’이라는 단어를 듣자 컴퓨터 화면을 향해있던 간호사 선생님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요즘 여성의원들은 수요가 많은 제모, 질염 치료 환자들이 많다 보니 임신 관련 환자를 받는 일이 드문 모양이었다. 5주 4일 차, 마침내 나는 1.8센티 크기의 작은 아기집을 보게 되었다. 진료를 마친 후 수납처로 가자 간호사 선생님께서 “임신 축하드려요”라는 말과 함께 핑크빛 산모 수첩을 전해주셨다. 2년간 내가 가장 받고 싶었던 축하였다.
산모 수첩은 이제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 좋다는 초대장 같았다. 나와 신랑은 그날 밤 작은 조각 케이크를 사 들고 조촐하게 축하파티를 했다. 이번에는 둘만의 파티가 아니었다. 뱃속 아기는 물론 우리의 배아 사진도 함께였다. 두 개의 배아는 너무 적다고 걱정했었는데, 두 개의 배아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남편은 ‘이제부터 집안일에는 손도 대지 말라.’며 ‘내가 다~하겠노라’ 호언장담을 했다.
모두에게 행복이었던 나의 임신. 양가 부모님들도 한마음으로 기뻐하셨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말리는 나를 옆에 두고 남편은 바로 시댁 카톡방에 임신테스트기 사진을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임신으로 유세를 떠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시부모님께서는 뛸 듯이 기뻐하셨고, ‘이번 추석에는 내려오지 말고 몸조리 잘하라.’는 말로 축하를 대신하셨다. 내 상황을 대충은 알고 있었던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에 몇 번 보지 못해서 온 가족이 모일 명절만을 손꼽아 기다리셨겠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다는 듯 ‘그래그래, 언제 한번 엄마가 올라갈게. 고생했어.’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도 기쁨이 묻어있었다.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서 뱃속 아기도 조금씩 아기집을 키워나갔다. 1.8센티였던 아기집은 7.2센티까지 커졌다. 커진 아기집 안에서는 희미하지만 작은 깜빡임이 보였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그 깜빡임이 아기의 심장이라고 했다. 이렇게 깜빡이기 시작하면 이제 곧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겠다며 ‘다음에 올 때는 남편분이랑 같이 와도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저 검고 흰 화면에 불과했지만, 그 반짝임은 내게 큰 울림이 있었다. 괜히 쿵쾅쿵쾅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안녕~엄마”하고 인사는 건네는 것만 같은 그 반짝임은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심장 소리를 함께 들을 영광을 주겠노라고 농담을 건냈다. 보물찾기 미션에서 먼저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들뜬 내 기분은 심해지기 시작한 입덧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울렁이는 속, 반짝이는 빛, 이 모든 게 겹쳐져서인지 그날 밤 나는 행복의 나라로 항해하는 선장이 되는 꿈을 꿨다. 그해 가을은 하늘도 맑았고 모두가 행복했으며 내 안에는 나를 설레게하는 반짝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