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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부부 Oct 17. 2021

눈물 젖은 장모님의 곰탕

남편, Y 이야기 - 유산


    아내의 뱃속에 우리의 아기가 자라고 있는 사실에 슬슬 적응될 무렵이었다. 아내는 내게 아기 심장 소리를 함께 들을 영광을 주겠다고 주말에 함께 초음파를 보러 병원에 가자고 제안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있을 무렵이라 우리는 M병원을 다니기 전 아내가 다니던 여성병원으로 향했다. 원래도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지만 그 무렵 아내와 함께 하는 모든 일은 임신 다이어리에 올리기 위해 내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접수 후 함께 대기하면서도 우리는 D-229일이 보이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D-229일, 우리를 가장 설레게 한 날이자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은날. 공교롭게도 이일이 있고 딱 1년뒤 오늘 이 글을 올리고 있다.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어 아내는 먼저 진료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쮸야(아기의 태명), 아빠가 간다.”     


중얼거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아내는 침대 쪽에 반쯤 기대어 누워있고 의사 선생님은 나를 초음파 화면 앞으로 이끌었다. 아내가 사진으로만 보여주던 아기집이 초음파 화면에 잡혔고, 그 안에 작은 반짝임이 보였다. 아내가 말한 것처럼 ‘정말 하늘에 떠 있는 작은 별 같구나.’ 하는 생각에 들떠있는 나와 달리 의사 선생님의 표정은 왠지 진지했다. 같이 화면을 보고 있는 아내의 눈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주 수로는 심장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저렇게 반짝이는 모습만 보여요. 지난주랑 비교했을 때 더 자란 것 같지 않네요. 아직 한 주정도 더 지켜봐야겠지만 다음 주까지도 변화가 없다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하고 싶었지만, 본인이 초음파 소리를 못 잡는 건 아닐지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해보고 있는 의사 선생님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래 걸려도 좋으니 제발 무슨 소리든 잡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초음파 기계는 의사 선생님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 아이는 정말 어렵게 우리를 찾아온 아이였고, 이렇게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날 리는 없었다. 여성의원을 나와 아내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적막했다. 평소 같았으면 먼저 아내에게 힘이 되는 말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을 해도 의미가 증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이어지는 일주일은 정말 어려운 시간이었다. 의사 선생님도 판단을 유보한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포기해버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작정 희망을 품자니 마음의 준비 없이 받게 될 상처가 걱정스러운 딜레마에 놓여버렸다. 나는 식탁에 올려둔 배아 사진을 보며 매일 격려를 보냈다. "아니지? 여전히 오고 있는 거지?" 아기에게 하는 말이자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주문이었다.     




    일주일 뒤 결국 마지막 남은 가능성조차 사라져버렸고, 아내는 강제로 임신을 종결하는 소파술을 받기로 했다. 나는 다행히 몇 일간 연차를 사용할 수 있어 수술 전후로 아내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전한 비극적인 소식에 장모님께서도 서울로 급히 올라오셨다. 뚜벅이 부부였던지라 차도 없어 역으로 모시러 가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들고오셨는지 양손 가득 얼린 곰탕, 각종 반찬과 과일을 가져오셨다.


 딸을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타기 전 눈물로 곰탕을 끓이는 장모님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장모님은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면서, 올라오면서 혼자 얼마나 슬픔을 삼키셨을까. 덤덤한 척하던 아내는 장모님을 마주하자 감춰왔던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장모님이 올라오셔서 다행이었다. 아내는 엄마(장모님)의 앞에서야 비로소 엄마로서 겪는 슬픔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었다. 장모님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아내를 꼭 껴안으며 아내의 등을 토닥였고, 아내에게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해먹이셨다.     



 

  수술 전날 밤 아내는 유산을 유발하는 약을 먹고 내 옆에 누웠다. 아내는 내게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해주라고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내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은 없었지만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의 배에 손을 얹고 말했다.

“쮸야. 우리에게 와줘서 너무 행복했고 고마워. 지켜줄 수 없어서 미안해. 그래도 엄마는 좀만 덜 아프게 해주라.”      


   그렇지만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었다. 아내가 먹은 싸이토텍이라는 자궁수축제는 엄청난 통증으로 아내를 괴롭혔다. 새벽에 작은 소음과 희미한 불빛에 눈이 떠진 나는 허전한 옆자리를 보고 놀라 아내를 찾았다. 아내는 끙끙대며 화장실에서 통증과 싸우고 구토를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보여줄게 못 된다며 가까이 오지 말라는 아내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무력감을 느꼈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통증이 그친 듯 창백한 얼굴로 아내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 괜찮냐는 물음에 아내는 안 괜찮다고 죽는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아프게 보내는 게 차라리 마음은 덜 아프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게 사라지는 것만큼 허무하고 마음 아픈 일이 어디 있겠냐는 아내의 말에서 나는 이미 엄마가 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장모님과 나는 M병원 수술실 앞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함께 들어간 사람이 많아서인지 1시간쯤 걸린다던 수술은 1시간 반이 훌쩍 넘었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시술 때와 달리 수술 중, 회복 중 등의 상태 표시도 없고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게 더 힘들었다. 그때 간호사가 우리와 함께 대기 중이던 다른 여성분의 보호자를 급히 수술실 안으로 부르더니 구급대원이 들이닥쳐 어떤 여성분을 들것에 싣고 나갔다. 소파술은 그리 위험한 수술이 아니라고 했는데, 원인도 모른 채 누군가 실려 가는 걸 보고 있자니 걱정스러운 마음은 더 커졌다. 우리 아내는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금세 수술실 문은 닫혔고 나와 장모님은 몇 시간이고 그 앞을 지킬 방법밖에는 없었다.


매정하게 닫혀있는 수술실 문앞. 진행 상황이 어떤지, 괜찮은건지 말해주는 이 하나 없이 나와 장모님은 하염없이 이 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시 수술실 문이 닫히고도 1시간 반이 지난 뒤에야 아내가 걸어 나왔다. 아내는 새벽에 느꼈던 통증에 비해서는 소파술은 그리 힘들진 않았다며 우리 앞에서 태연한 척했지만 충혈되고 팅팅 부은 눈까진 속일 순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장모님께서는 아내가 잠든 틈을 타 내게 곰탕을 끓이고 보관하는 방법을 설명해주신 뒤 출근도 해봐야 하고, 우리에게 부담이 될지 모른다며 먼저 내려가 보시겠다고 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 말 때문인지 장모님은 결혼 후 내게 일절 집안일을 시키지도, 다른 부탁을 하지도 않으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배웅 나간 내게 몇 번이고 당부하셨다.   

  

“Y서방, 자네도 실망이 클 텐데…. 힘내게.
B가 깨어나면 꼭 따뜻하게 데워서 곰탕도 함께 먹고, 회복할 때까지 잘 부탁하네.”

“저보다는 B가 상심이 훨씬 크죠…. 그래도 제가 B옆을 잘 지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장모님이 가신 후 아내는 장모님의 곰탕을 먹을 때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 눈물을 흘렸다. 몇번을 다시 끓여 진한 맛이 나는 곰탕에서 나는 ‘눈물 젖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곰탕은 장모님과 아내처럼 엄마들의 눈물이 담겨 더 깊은 맛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뒤 나는 마지막으로 임신 다이어리 앱에 장모님의 곰탕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남긴 기록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캡처한 뒤 앱은 지워버렸다. 자주 볼 수는 없어도 작게 반짝이던 이 아이도, 장모님의 곰탕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괜찮은 듯하다가 맑은 하늘만 봐도 눈물이 핑 도는 시간을 끝으로 그해 겨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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