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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부부 Oct 18. 2021

죄송합니다! 오늘도 지각입니다.

아내, B 이야기 - 일과 경제적 문제


    ‘라떼는 말이야’ 이야기지만 우리 엄마는 슈퍼우먼이었다. 지금은 최고의 신붓감 중 하나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시지만 그때는 학교 선생님도 예외가 없었던 건지 엄마는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복직하셨다. 육아기 단축 근로는 꿈도 못 꾸고 어린 나와 동생을 어린이집, 할머니 댁에 맡기고 일을 한 뒤 다시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집안일을 해낸 엄마. 엄마가 매일 차려주는 아침, 저녁상은 잘 나온다고 소문난 학교급식보다 화려했고, 주 6일을 일한 뒤 남은 주말에 우리 가족은 이곳저곳 여행도 많이 다녔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와 동생의 대화에는 유년기의 추억이 종종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엄마의 노력으로 우리는 자랐고, 우리 가정은 행복했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란 나는 어른이 되면 나도 엄마처럼 모든 걸 다 잘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제 몫을 해내고 마는 능력은 유전처럼 외할머니에서 엄마로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랬던 나의 자신만만함은 난임을 만나고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직장인이 된 뒤 ‘유능한 직원은 못되어도 남한테 폐를 끼치지는 말자’고 다짐했던 나의 초심도 지켜낼 수 없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오늘도 지각할 것 같은데요….”

    

는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고, 워킹맘으로도 불릴 수 없는 마이너한 존재인 나는 자주 늦고, 갑자기 전날 연차를 내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버렸다.




    난임병원만큼 내원이 잦아지는 병원도 드물 것이다. 그 이유는 역시 깜깜이 진행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인생 모든 게 다 그렇긴 하지만 임신이야말로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하다. 난자가 배란되는 바로 그 순간 튼튼한 정자부대를 보내 난자와 만나게 하는 것이 임신 성공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난자라는 친구는 수줍어서 평균적으로 12~24시간만 얼굴을 보여준다고 하니 정자가 너무 일찍 도착해도, 너무 늦게 도착해도 그들의 만남은 성사될 수 없다. 때문에 그 타이밍을 정확하게 캐치하기 위해 꾸준히 초음파를 보며 정확한 타이밍을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만약 시술 단계로 접어들었다면 이 과정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약이나 주사로 많이 키워놓은 난포에서 시술 전 난자가 미리 배란되기라도 하면 그동안의 고생도 물거품이 되고 돈은 돈대로 쓰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7시가 되기전에 벌써 23명이 기다리고 있는 이곳, M병원의 아침은 뜨겁다.

     

    다행히 M병원의 경우 7시 30분부터 모닝 진료를 보고 있지만, 이마저도 직장인 여성들의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녹록지 않다. 한 타임 예약도 의사 선생님 별로 3~5명 정도만 받는 데다 생리 시작, 혹은 난포 성장 속도에 의해 진료 일정이 갑자기 확정되기 때문에 가끔은 진료 인원이 꽉 차서 8시 30분까지 진료가 늦춰지기도 한다.


    운이 좋게 7시 30분으로 예약을 잡았다고 해서 안심해서도 안 된다. 전국구로 유명한 난임병원인 이곳을 찾기 위해 지방은 물론 해외에서도 방문하는 경우도 있다. 오전 반차를 쓰고 오는 게 분명할 타지역 여성분들은 새벽 기차를 타고 M병원에 방문하시기 때문에 6시 30분부터 난임병원의 로비는 반쯤 몽롱한 상태로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순진하게 7시 30분에 가서 대기표를 뽑으려고 하다가는 8시 예약자들과 함께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죄송합니다 말고는 할말이 없는 상황.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상황은 종종 발생하곤 한다.


    자, 그럼 운도 좋았고 새벽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앞쪽 순번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모든 걱정이 끝나느냐? 그것도 아니다. 응급환자나 시술이 생기면 담당 의사 선생님이 최소 30분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되는데 이 시간 동안은 또 마냥 진료실 의자에 앉아 대기하며 팀장님께 말줄임표를 잔뜩 붙인 석고대죄 메시지를 드리는 수밖에 없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

   



    물론 운 좋게 난임 휴직이 가능한 직장을 다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난임 부부의 고민은 계속된다. 실비보험도 되지 않는 난임병원의 진료비, 약제비는 난임 휴직이 가능한 여성들도 휴직을 망설이게 만든다. 물론 국가에서 난임 진료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는 ‘난임시술 정부지원금’ 제도가 있긴 하다. 하지만 ‘중위소득 180% 이하의 난임 부부’만 지원대상이기 때문에 맞벌이 부부라면 지원대상이 아닌 경우가 많다. 또 인공수정은 최대 30만원, 시험관 시술을 최대 110만원만 지원대상에 해당 되기 때문에 시술 외 검사를 할 때는 해당 사항이 없고, 시술비용이 지원금액을 초과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게다가 피부과 시술과 달리 난임병원의 시술은 수납처에 가기 전까지는 내가 얼마를 계산하게 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진료실에서는 ‘이번에는 면역치료를 추가할 거에요’라는 안내는 받지만 ‘면역치료로 인해 10만원이 추가 청구될 것입니다’하는 설명은 의사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 월급의 절반이 넘는 돈을 하루에 결재하며 손이 떨린 적도 있었다. 진료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면 남편은 말했다.

    

“괜찮아. 그 돈 없어도 우리 안 죽어. 하나도 아깝지 않잖아. 스트레스 받지 마.”     


    나도 안다. 우리는 죽지 않을 거고, 그 돈의 배가 들어도 건강한 아기를 하루 빨리 만나게만 된다면 아깝지 않다. 하지만 ‘애 키우기 시작하면 돈 못 모은다. 지금 아니면 돈 못 모은다’라는 결혼 선배들의 말씀이나, 매월 따박따박 빠져나가는 대출이자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태어나기 전에 쓴 돈으로 태어난 후 해주고 싶은 것들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쩌나 너무 이른 걱정들도 머리를 스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진료 및 시술 일정,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과정에서 회사의 눈치를 보는데 지친 나는 ‘일을 관둘까?’하는 고민을 수십 번도 더했다. 3 년째 이어지는 나의 난임 병원행에 우리 팀은 자연스럽게 내게 급하지 않은 일만 맡기고 있었고, 나는 팀원들에 대한 미안함에 꿈 속에서 팀원 한명 한명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엉엉 우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마음 편하게 가져.”라고 말씀해주시는 팀장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감사합니다.’뿐이었다. 일을 못하면 잠을 줄여서라도 그 일을 배우고 시간을 들여 처리하면 될 문제였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나는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팀장님의 격려를 받은 날 시술 일정을 알려주러 걸려온 게 분명한 M병원의 전화를 받고 나는 복도 화장실로 향했다. 당장 내일 채취라는 일정을 전해 듣고 다시 또 팀장실에 들어가서 연차를 쓰겠다고 보고 드려야겠구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화장실 앞에서 다른 부서 여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선생님 OO이 엄마에요.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일찍 못 갈 것 같아서요.
애아빠도 힘들다고 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지금은 ‘OO이 엄마가 될 수 없어서’ 미안하지만, 곧 ‘OO이 엄마라서’ 미안해지겠지....

문득 난임병원을 졸업한 뒤에도 팀원 모두에 대한 나의 석고대죄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엄마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졌을 수백, 수천 번의 미안함을 먹고 자라난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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