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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부부 Oct 21. 2021

그래서 우리는 그냥 행복하기로 했습니다.

아내, B 이야기 – 난임 부부의 행복론, 자세

※ 주의 : 이글에는 애니메이션 영화 Soul(2020)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방 출신의 서울 정착민이라서 기차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던 학생 때는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돈이 많진 않아도 시간이 더 아까워진 지금은 KTX를 애용한다. ‘차만 타면 잔다.’라는 나의 초능력은 기차에서도 발휘되기 때문에, 대게 나는 20~30분이 지나면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곤 한다. 어느 날 나는 기차 시간에 가까스로 맞춰 숨을 허덕이며 서울역에 도착했다. 전광판에서 열차번호까지 볼 여유도 없이 대충 떠나기 직전의 기차를 잡아타고 내가 예매했던 좌석에 앉았다. 무사히 열차에 올라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날따라 나는 기차에서 금세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귓가에 차내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진주로 가는 KTX 4021 열차가 대전역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아……. 벌써 대전이야? 잠깐만, 진주!?’     


    침까지 흘리며 꿀잠을 자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는 곳은 동대구, 그러니까 이 기차는 동대구행 혹은 부산행이어야 했다. 마침 지나가는 승무원이 보여서 나는 동대구에서 내려야 하는 사람인데 기차를 잘못 탄 것 같다고 사정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승무원은 


“네, 고객님. 이 기차가 동대구를 경유하는 진주행 열차입니다.”


라는 말로 황당함을 표현했다. 아……. 그 순간은 나의 30년 졸음 인생 최고의 굴욕 중 하나였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이 기억 덕분에 가끔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어떤 행 열차를 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기차에 몸을 싣고 그저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만 가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난임 역은 그저 경유지일 뿐, 나는 임신행 열차에 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임신도 경유하는 역일 뿐 우리 부부의 행선지는 그 너머 어딘가로 향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내가 타고 있는 기차가 너무 늦다고 생각할 땐 ‘더 멀리 가기 위해 잠시 기차를 수리하는 중이다.’ 생각하고, 이유 없이 닥친 불행에 흔들릴 때는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실수로 커피를 내 옷에 쏟았다.’라고 생각해본다. 그래도 서글플 때는 같은 기차를 타고 가고 있는 남편을 바라본다. 100프로 나를 이해하진 못해도 늘 내 옆자리를 지키는 사람의 존재는 흔들리는 나를 바로 잡아준다.     




    임신 후 소파술로 아기를 떠나보낸 뒤 나는 크게 흔들렸다. 그때도 나를 잡아준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더 건강한 우리가 되어 더 건강한 아이를 품어보자고 나에게 제안했다. 그때부터 우리의 부부 프로젝트는 하나씩 시작되었다.      


함께 건강해지고, 함께 추억을 쌓아가고있는 우리. 물론 '王'자는 없어진지 오래고 지금은 오동통하게 살이 올랐다.


    대망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함께 건강해지기’였다. 모호한 목표는 그 과정도 흐지부지 흐려지게 하기에 허황되지만 100일 뒤 요즘 유행한다는 ‘커플 바디프로필’을 목표로 운동과 식단을 시작했다. 난관 없는 프로젝트는 없었다. PT까지 끊어가며 제대로 준비해보려 했지만, 코로나 확산세가 심해지면서 실내 운동 시설 집합 금지령이 내려졌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홈트레이닝으로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 어설프게나마 100일간의 저.탄.고.단 식단과 운동을 통해 우리는 각각 10킬로 가까운 몸무게를 감량하고 표준이상의 근육량 달성에도 성공했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함께 추억 쌓기’였다. 한때 코로나와 긴 난임 생활로 인해 친구와의 만남이 뜸해져서 나의 일상은 단조로움 그 자체였다. 종일 임신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고, 의미 없이 이 유튜브 알고리즘이 인도해주는 영상들을 보면서 여가를 채웠다. 사진첩을 뒤져봐도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도, 아름다운 풍경 사진도 찾을 수 없었다. 생각해봤다.      


‘아이가 태어나는 가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와줄까?’     


   태어나기 전 영혼들의 세계를 다루는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Soul, 2020)이 생각났다. 그 영화 속에서 오래된 영혼 22(숫자와 구분하기 쉽게 ‘투웬티투’라고 표기하겠다.)는 지구통행증인 가슴 속 ‘불꽃’을 찾지 못해 인간 세상으로 가지 못한다. 그랬던 투웬티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틈에서 자신만의 불꽃을 찾고 지구로 내려가게 된다. 투웬티투가 발견한 일상은 햇살이 비추는 맑은 하늘, 맛있는 음식, 가족 간의 사랑이 담긴 대화 그뿐이다. 평범한 하루하루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최대한 많은 곳을 다니고, 계절에 맞는 음식을 먹고, 유명 맛집을 가서 줄 서서 먹은 후기도 블로그에 남기며 일상을 알록달록 채워가고 있다. 때로는 음식 사진을 찍다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때로는 이 계절만이 줄 수 있는 감상에 젖기도 한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나의 일상이 채워지면서 다른 사람과의 일상적인 대화도 불편하지 않아졌다는 점이다. 이 프로젝트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마지막 프로젝트는 ‘힘들었던 과거를 되짚으며 서로를 더 이해하기’, 바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부부가 함께 난임 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가장 최근 우연히 성공한 자연임신이 다시 유산으로 끝난 뒤 나는 남편에게 “우리 잠깐 얘기 좀 해” 심각하게 말을 걸었다. 우리 부부의 심각한 얘기에는 준비물이 필요하다. 일단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종이, 그리고 두 자루의 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며 마인드맵을 그렸다. 왜 임신을 하려 하는지, 언제까지 임신 시도를 하는 게 좋을지, 아기가 없이 사는 삶은 어떨지 등등 ‘임신’이라는 핵을 중심으로 가지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가 나아갈 미래를 두렵게 하는 과거를 되짚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임병원 입성 초기부터 임신 성공, 유산,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보기로 했다. 고통뿐이었을 것만 같은 지난날에도 희망, 소소한 행복, 농담, 따뜻한 위로가 숨어있었고 어쨌거나 늘 우리는 함께였다.   

   



    물론 이런 프로젝트가 나를 늘 행복하게 하진 않는다. 나는 여전히 새벽녘에 눈을 떠서 두 줄을 확인하고, 피하주사는 여전히 피하고 싶고 이번 차수가 실패로 끝나면 또 좌절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도 태어나기 전 영혼이 ‘아~저 부부의 삶은 함께 살아도 좋겠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그 삶이 아내 B, 남편 Y 사이에 빠져있는 알파벳 A, B가 되어 BABY를 완성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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