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Y 이야기 - 가족과의 갈등
당연한 말이지만 결혼 전에는 집에 내려가는 게 두렵지 않았다. 아침부터 제사를 지내는 명절도 엄마표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시간에 불과했다. 결혼 후 나는 홀몸(?)이 아닌 사람이 되었고, 아내와 함께 우리 집에 있는 시간은 편한 듯 편하지 않았다. TV 속 ‘사랑과 전쟁’처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똑똑하고 야무진 며느리가 들어왔다며 아내를 좋아했고, 아내도 그간 무심한 아들이 신경 쓰지 않았던 작은 부분까지 살뜰히 챙기고, 결혼 전 하지 않았던 명절 제사음식 준비도 군말 없이 따라주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전혀 다른 가풍에서 자라난 아내와 30년간 아들 둘과 지내 온 우리 부모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
아내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드러내야 할 부분과 드러내지 않아야 할 부분의 선을 명확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건 아내 쪽 집안 내력인 듯 결혼식장에서 장인어른은 수많은 하객 앞에서 아내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머리 위로 큰 손 하트를 그리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장모님은 아픈 곳이 있어도 아내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해 아내를 걱정하게 하는 걸 싫어하셨고 내가 보기엔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편하게 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들도 잘 공유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아내의 집을 ‘비밀의 성’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반면 우리 집은 달랐다. 아들 둘을 씩씩하게 키워낸 엄마와 아빠는 섬세하진 않아도 매사에 솔직하게 감정표현을 하셨고, 어른들끼리 결정해도 되었을 일도 아들들에게 털어놓고 함께 고민하는 타입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어떤 직장에 원서를 넣었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모든 걸 부모님께 터놓고 지내던 나는 결혼 후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이제는 말해야 할 부분과 말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생겨버린 것이다.
“오빠,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아내의 이 말은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 중 하나였다. 우리의 결혼 생활과 관련된 문제는 비밀의 영역에 들어가야 하는 말이었다. 특히 아내는 결혼 초기부터 임신 준비 부분은 사생활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각자의 부모님에게 말하지 말자고 내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 의외로 약속을 깬 쪽은 아내였다. 아내는 연이은 시술 실패로 무너져내렸고 결국 아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장모님께 SOS를 쳤다. 나는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아내와 장모님이 한 겹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께는 달랐다. 아내는 끝까지 우리 부모님에게는 임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렸다. 특히 M병원에 다닌 이후에는 임신과 관련된 우리 엄마의 솔직한 돌직구 화법을 못 견뎌 했다.
“그래, 너네 애는 언제 가질라고?”
“빨리 낳아서 기르는 게 좋데이~ 내 친구 XX네 딸 알제?”
“노력은 하고 있나?”
나로서는 늘 듣던 엄마표 말이어서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우리 부모님을 어려워하는 아내의 처지에서 그 말들은 당혹스러운 원투 펀치였다. 나는 그런 엄마를 자제시키기 위해 ‘자궁외임신으로 MTX 주사를 맞아 임신 종결을 한 적이 있다.’라는 사실을 꺼낸 적이 있었다. 아내는 표정이 굳었지만, 그날 이후 엄마의 잔소리가 줄어든 것 같아 보이자 한숨 돌리는 듯했다. 다시 엄마표 잔소리가 시작될 시기 즈음에는 마침 우리 부부에게 실제로 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손주를 간절히 기다리던 양가 부모님들은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용돈까지 보내주시며 뛸 듯이 기뻐하셨다. 너무 빨리 떠난 아기 이야기는 여전히 금기의 영역이었지만, 어느 순간 엄마는 다시 이런저런 얘기들 사이에 슬슬 아기 얘기를 끼워서 꺼내기 시작했다. 아내는 어느덧 내성이 생긴 것인지 그런 발언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을 했고, 나는 ‘이제 아내도 강해졌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곤 했다.
그러다 결혼 3주년 기념일이 있는 주말이 다가왔다.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우리는 사진을 촬영하는 우리만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올해 찍은 사진은 퀄리티가 상당히 좋게 나와서 그날 저녁 아내와 함께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릴 때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진 얘기를 꺼내며 결혼 3주년을 알리자 이번에는 뜻밖에 아버지께서 우리 부부를 향해 기습펀치를 날리셨다.
“그게 좋나. 결혼 3년 차에 애도 없는데 그게 뭐냐 좋냐?”
아버지의 말투에서 술 냄새가 느껴지는 듯했다. 술 드신 김에 던진 농담일 게 분명했지만,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좋았던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아내는 다가오는 시험관 시술 일정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였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으니 오늘은 이만 끊겠다.’라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의외로 아내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그럼 이제 우리 집에 전화할까?”라고 말을 돌렸다.
그날 저녁 우리는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무던한 성격인 내게도 아버지의 그 말은 상처였는지 샤워를 할 때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말은 몇 번이고 다시 떠올랐다.
‘아버지는 왜 저런 말을 하셨을까? 우리가 딩크족으로 살겠다고 선언했다면 아쉬움을 농담에 담아 말할 수 있다고 쳐도,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노력하고 있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다음 날 아내는 조심스럽게 내게 전날 일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아내에게도 그 일은 상처였다. ‘우리는 행복한 척하고 살아도, 행복할 수 없는 난임 부부일 뿐’이라는 아내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런 의도 아니었을 거라고 변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조차 그런 아내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난임 부부였고, 문득 그 사실을 인지할 때면 내게도 씁쓸함이 밀려오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에게 부모님께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아내의 탓을 할 수도 없게 오로지 내 문제로 우리가 병원에 다니고 시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YES도 NO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길어지면 혹여 실수라도 할까 나는 엄마·아빠에게 전화를 걸기 전 몇 번이고 해야 할 말들을 곱씹었다. 그간 모범적인 길을 걸으며 순탄하게 자라온 막내아들의 난밍아웃이 부모님에게 어떻게 들릴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바싹바싹 마르는 입을 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부모님께서는 중간에 말도 끊지 않고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전화 통화는 짧게 끝이 났고 “아버지의 그 말은 우리 부부에게 너무 큰 상처였어요”라고 말하자 아버지께서도 “너희가 그렇게 힘들게 노력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라며 미안하다 하셨다. 이상하게 부모님에게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듣자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게 민망했고 나는 “그럼 주말에 다시 전화드릴게요.”라고 다시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난임이라는 아픔은 이제 부모님에게까지 전염된 것이다. 나는 부모님께 전한 내용, 부모님의 반응을 아내에게 전했고 이제는 정말 부모님으로 비롯된 임신 스트레스는 받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내는 힘들었을 텐데 부모님께 그렇게 전해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사건이 정말 끝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부모님의 임신 발언이 중단될지언정, 그 바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들에게 원인이 있어 임신할 수 없더라도 최종적으로 임신은 여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아내는 끝까지 이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내는 건강한 아이가 우리 곁에 함께 숨 쉴 때까지 불안해할 것이고, 우리 부모님의 눈치를 살필 것이다. 반면 난밍아웃 전후로 우리 부부에게 임신과 관련해서 한마디도 꺼내지 않던 장인·장모님이 떠올랐다.
나는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라는 시중에 떠도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내가 끼어들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지레짐작으로 우리 가족과 아내의 사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던 내가 비겁하게 느껴졌다. 임신을 대신해 줄 수는 없어도 아내의 아픔을 외면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 말고는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번에도 나는 임신에 있어 당사자인 동시에 당사자가 아닌 ‘남’편이 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