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쉼표24 : 부모님의 은퇴 후 라이프를 응원하며.]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엔 늘 ‘일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서류가 잔뜩 들어있던 아빠의 직사각형 가죽 가방,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아빠의 투박한 구두 굽 소리, 책장 가득 꽂혀있는 작은 글씨의 책과 논문들, 그리고 나지막이 들리던 피로한 한숨까지.
그래서일까. 은퇴를 앞둔 부모님을 보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두 분은 잘 놀 수 있을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평생 성실하게 일만 하던 사람이 잘 놀 수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은퇴 첫해, 그 걱정은 기우였다. 두 분은 마치 청춘을 되찾은 듯, 하루걸러 공항으로 향했다.
“또 여행이에요? 그러다 몸 상해요”라며 핀잔을 주던 나에게 아빠는 웃으며 말했다.
“젊을 때 가야지. 아직 가볼 데가 많다.”
그 말처럼 두 분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파리, 피렌체, 프라하로 끊임없이 바뀌었다.
그 행복한 사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1년쯤 흘렀다.
추석 연휴, 모처럼 친정집에 내려가 조용히 TV를 보던 아빠 옆에 앉았다.
“아빠, 요즘 뭐 하고 지내요?”
“아빠야 뭐~ 똑같지.”
그 틈을 비집고 조금씩 나온 아빠의 근황은 어딘가 귀엽고도 짠했다.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그림이나 서예를 배우러 문화센터를 신청했는데, 정말 원하던 서양화 수업은 인원이 다 차서 신청하지 못했다는 것. 얼떨결에 유화를 신청했는데 너무 실력 차이가 나서 도저히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 서예반을 지키는 구성원들의 연령대는 또 너무 차이가 나서 (10살 이상 많았다고 한다) 체면상(?) 갈 수 없다는 것. 그러다 이내 말했다.
“요즘은 그래서 드론을 좀 배워볼까 생각 중이야”
아빠의 지난 날들엔 시작만 있고, 아직 끝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빠의 서툰 시도들이 좋았다. 오히려 취미를 찾으려 애쓰는 그 마음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서양화가 안 되면 유화를, 유화가 안 되면 서예를, 서예가 안 되면 드론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른 문을 두드리는 아빠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취미를 찾는다는 건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라, 평생 일하느라 미뤄뒀던 자기 자신을 되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문득 미국 아이비리그 학생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계적인 수재들이니 만큼 왠지 자라온 내내 공부에 올인했을 것 같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예체능의 어떤 분야에서 놀랄 만큼 우수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추측컨대 공부만 하는 삶은 권태와 허무에 잠식당하기 쉽고 또 예술과 취미와 함께하는 삶이 행복과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수업을 앞두고 있는 초등학생과 네살 쌍둥이를 앞에 두고
“내일은 뭐하는 날이지?”라고 묻는다면 누구의 대답이 더 생기 있을까?
아마 초등학생들은 시큰둥하게 “몰라. 미술하는 날일걸?”한다면,
네살 쌍둥이들은 “내일은 물감놀이 하는 날이지롱!!!”
하고 설렘 가득한 대답으로 듣는 사람마저 웃게 만들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미술은 놀이에서 수업이 되고, 우리네 삶에서 즐길 수 있는 범주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다양한 취미생활과 놀이로 삶을 풍요롭게 채워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그리고 그 맛을 너무 오래 잊고 살다 보면, 은퇴 후에는 '그런 삶이 내게 있기나 했던가' 싶어지지 않을까.
몇십 년을 공부와 일에 이 악물고 살아온(아빠 말로는 ‘쎄가 빠지게 일한’) 두 분께 나는 이제 바란다.
월요일엔 베이킹으로 향긋한 빵내음이 가득한 하루를,
화요일엔 노래교실에 가서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하루를,
수요일엔 젊잔 빼면서 근엄하게 서예를,
목요일엔 뻐근한 몸을 풀어주는 요가를,
금요일엔 멋드러지게 악기를 연주를 하는 그런 삶을 살기를.
서툴고 어색하더라도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취미로 하루하루를 물들이는 삶. 유화 수업에서 실력 차이에 주눅 들지 않고, 서예반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붓을 드는 삶. 아니면 그 모든 걸 다 해보다가 결국 드론이 제일 재밌다며 웃는 그런 삶.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오늘은 또 뭐하냐?"가 아니라 "오늘은 또 뭘 해볼까?" 하고 기대하며 일어나는 삶.
그게 바로 내가 두 분께 바라는 은퇴 후의 풍경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우리 엄마아빠. 오늘도, 내일도, 브라보. 유어 라이프!
25.10.20
매일 자식 걱정만 하시는 엄마아빠는 아실까요?
종종 엄마아빠 생각에 잠기는 이제는 두아이의 엄마가 된 제 마음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