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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림 Mar 17. 2018

그의 첫사랑은 누구였을까?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웅진 씽크빅 표지

※이 글에는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전은 절대 읽지 않았을 것이다. 고전은 몇 백 년간 살아남은 ‘흥미로운’ 글이지만, 그 흥미로움을 발견할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요즘 글들과 달리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200페이지가 넘는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고전만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성격이 급한 나로서는 그 말에 동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작품은 그런 뭇 고전과 다르게 본론이 매우 빠르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나의 성미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작품이 매우 별로다. 그 이유인즉슨 아름다운 문장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형적으로 싫어하는 '감정 허우적 유형'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태까지 읽은 고전 중 ‘감정 허우적 유형’에 해당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물론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마담 보바리, 위대한 개츠비.... 나는 정말이지 베르테르, 보바리, 데이지의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니 말이다. 그리고 ‘첫사랑’ 역시도 이 ‘감정 허우적 유형’에 속한다.     


이 소설은 대강 이런 이야기다. 주인공 볼료댜는 이사 온 아름다운 여자 지나이다를 보고 첫사랑에 빠진다. 지나이다에 아름다움에 빠져 그 주변을 맴도는 남자는 볼료댜 뿐만이 아니다. 하지만 볼료다는 자신이 지나이다와 특별한 관계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녀에게 언젠가부터 비밀의 연인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미칠듯한 질투를 느낀다. 그 비밀연인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질투는 없어지고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관계를 진실한 사랑이라 규정한다.     


내가 이 소설에서 정말 불편한 부분은 주인공이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  이전에 느꼈던 질투는 사라진 채 진실한 사랑이라 규정하는 것이다. 이 심리 변화가 나는 너무 갑작스러웠고 조금도 동감되지가 않는다.      


초반부에 볼료다는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보다 더 기품 있고 침착하면서도 자신감에 찬 독재자를 본 적이 없다.’ 볼료다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여기서부터 일단 동의가 안 되었다. 나는 독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독재자인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가 독재자여서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경우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 있기 마련인데 작품 안에서 볼료다의 반발심을 찾을 수가 없다.     


지나이다의 관계도 그렇다. 지나이다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지나이다에 대한 볼료다의 감정은 진실한 것이었을까. 감히 장담하건대, 볼료다는 지나이다에 대해서 1도 몰랐다. 그 여자가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라는 거 외에 뭘 알았단 말인가? 그는 환상 속에서 지나이다를 규정한다. 그녀를 자체로 사랑한 거라고는 동의할 수 없다. 이 면은 아버지와 지나이다가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질투가 없어지는 면에서 더 그러하다. 정말 그가 지나이다를 사랑했다면, 그게 설사 아버지였어도 질투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볼료다의 첫사랑은 지나이다가 아닌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볼료다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남자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에 대한 동경, 그것을 볼료다는 첫사랑이라고 부른 것 아니었을까. 마지막에 아버지와 지나이다를 동시에 추억하는 장면에서 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볼료다는 이때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빠졌던 거 같다. 첫사랑이란 그렇지 않은가. 상대방의 감정보다도 내가 느끼는 감정 자체에 빠지는 감정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난 이 작품에 나타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다. 아버지의 부적절한 관계를 용인한 볼료다에 대해서도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으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불안한 첫사랑의 기억, 그것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감정에 허우적거린 작품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 역시도 내게 가치 있게 느껴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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