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던 사랑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랑아, 화가 나면 어떻게 풀어?"
"... 나는 화가 나도 금방 잊어버려. 안 풀어."
사랑이의 대답은 마치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짧고 담담했다. 고개를 약간 돌리며 무심하게 내뱉는 말투에, 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 태도가 묻어났다.
그 순간 나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감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아니, 표현했던 감정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감정은 표현하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가 나면 참고, 슬퍼서 눈물이 나면 삼키고, 기쁨조차 혼자 간직했다.
사랑이도 그랬을까? 아마도 지난 4년 동안 감정을 주고받을 기회가 적었을지도 모른다. 그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배울 시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말처럼 정말 그렇게 쉽게 사라질까?
그저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몰라 묻어버리는 습관이 생긴 건 아닐까?
금방 잊는다는 건 감정이 증발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음속 아래로 가라앉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사랑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도울 수 있을까. 감정노동의 순간을 버텨내기 위해 만들었던 그 이야기를 사랑이에게도 해줘도 되는 걸까. 우리 마음속에는 감정그릇이 하나씩 있다는 바로 그 얘기를.
"사랑아, 엄마는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가 참 미웠어.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이유도 없이 안된다고만 하셨거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니까 더 이상 할아버지에게 말을 안 하게 됐어. 어차피 들어주지 않는데, 왜 그 불편한 일을 계속하겠니. 가부장적이고 공감할 줄 모르는 아빠와 딸은 사이가 좋긴 힘든 것 같아."
"응."
"사랑이도 아빠랑 그래?"
"응. 공감할 줄 몰라."
"우리 사랑이도 엄마처럼 아빠와 말하는 게 싫어졌어?"
"그래."
"우리 사랑이, 그랬구나."
사랑이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늘 그렇듯 대답은 짧았다.
"그때 엄마의 꿈은 집에서 먼 곳에 있는 대학에 가 자유롭게 사는 거였어.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대학이었거든. 서울에 와서 혼자가 되었을 때 엄마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을까?"
"모르겠어."
"엄마는 할아버지와 살 때와 많이 달라지지 않았어."
"왜?"
"습관이란 게 참 무섭더라.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감정을 누르면서 살다 보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도 그렇게 되는 거야. 엄마는 어느 사이 '잘 참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 다들 잘 참는다고 칭찬하니까 남 눈치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참고,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참게 되더라."
"응."
"우리 사랑이가 어릴 때, 엄마 등을 꼭꼭 밟아주던 거 기억나?"
"아니."
"엄마는 그때도 여전히 잘 참고, 표현을 못했는데 이상하게 자주 체했어. 탄산을 달고 살았지만 쉽게 좋아지지 않았는데 사랑이가 등을 밟아주면 이상하게 속이 편해지는 거야."
"체해서 그랬어?"
"응. 그땐 사랑이가 엄마의 소화제였지."
여전히 무표정하게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에 올라와서 꼭꼭 밟고 다녀도 무겁지 않았던 꼬맹이가 이젠 나와 키가 비슷하다. 내 뼈들의 안전을 위해서 밟아달라고는 이제 못하겠다.
"이제는 안 체해?"
"그건 왜?"
"요즘 엄마가 탄산을 마시는 걸 못 봤어. 엄만 음료수도 마시지 않고, 물만 마시잖아."
"오, 우리 사랑이 엄마에게 관심 있었구나. 기쁜데?"
"......"
고개를 살짝 돌리는 사랑이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도 잘 알기 때문에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표현할 날이 곧 올 테니까. 그저 기다리면 그뿐이다.
"이제는 잘 안 체해. 엄마가 체하는 이유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눌러 참았기 때문이란 걸 알았거든."
"체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음... 우리 사랑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지 못했던 적 있어?"
"있어."
"그때 기분이 어땠어?"
"음..."
"가슴이 답답하지 않았어?"
"어. 그랬어."
"그렇게 가슴 답답한 일들이 있고, 또 있고, 또 있으면 어떻게 될까?"
"모르겠어."
"엄마는 그럴 때면 체했어. 그리고 머리가 아팠어."
"나도 머리가 아픈데..."
"응. 그럴 거라 생각했어."
나는 손을 뻗어 사랑이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감정그릇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사랑이의 눈빛이 내게 머무르는 걸 느꼈다.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랑아, 우리 마음엔 감정그릇이 하나 있어."
"감정그릇이 뭐야?"
"감정이 담기는 그릇이야."
"......"
"그릇이 하나 있다고 상상해 봐. 그 그릇에 물방울이 떨어져. 어떤 물방울은 가볍고, 어떤 물방울은 흙이 좀 섞인 것처럼 어둡고 무거워. 똑똑똑 한 방울씩 떨어진 물방울이 그릇을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
"넘쳐."
"맞아. 넘쳐흘러. 만약 그 그릇이 마음속에 있다면, 넘쳐흐른 물은 어디로 갈까?"
"마음 안에."
"그렇지. 마음 곳곳으로 흘러간 그 물을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모르겠어."
사랑이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며 얇은 주름들을 만들어냈다.
"감정 그릇에 쌓여 있던 감정들이 흘러넘치면 그 감정이 한 번에 드러나게 돼. 갑자기 화내는 사람 본 적 있어?"
"어. 친구들도 그러고, 아빠도 그래."
"그게 바로 흘러넘친 감정이 드러난 거야. 그때는 좋게 표현하기 힘들어져. 펑펑 우는 사람을 본 적은 있어?"
"응."
"그것도 같은 이유야. 한꺼번에 겉으로 드러나면, 평소에는 얌전하고 조용하던 사람도 무섭게 화를 내거나 펑펑 소리 내서 울기도 하거든. 이건 이해돼?"
"조금."
"그래. 이번엔 다른 예를 들어볼게. 엄마처럼 참는 걸 잘하는 사람의 감정 그릇이 넘치면 화를 내고 소리 내어 울까?"
"... 아닐 것 같아."
"딩동댕. 정답! 엄마는 그러지 못했어. 그런 감정까지 참았거든. 몇 달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고, 숨쉬기 힘들었던 적도 있었고, 길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어."
"쓰러졌어?"
"응."
걱정이 서린 사랑이를 바라보며 웃어준 뒤 말을 이었다.
"되게 무서웠어. 그런 시간 덕분에 엄마가 깨달은 게 있어. 감정을 잘 참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해치더라고. 그때부터 엄마 스스로 감정을 돌보기 시작했어."
"감정을 어떻게 돌봐?"
"마음속에 감정그릇이 하나 있다고 했잖아. 감정그릇에 감정이 가득 차 넘쳐흐르지 않게 하는 게, 감정을 돌보는 거야."
"모르겠어."
"응.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그릇에 물이 가득 차 흘러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물을 붓지 않으면 돼."
"오, 정답! 감정 그릇에 감정이 쌓이지 않게, 그때그때 감정을 흘려보내면 돼.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고, 기쁘면 기쁘다고 소리도 지르고, 화가 나면 이런 이유로 화가 난다고 설명도 하고, 속이 답답하면 소리도 지르는 거야. 물론, 상대와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겠지만 단 한 사람만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괜찮아."
"누구?"
"나! 네 엄마."
"......"
사랑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엄마는 감정쓰레기통 전문이지, 감정 회복 탄력성 좋지. 나 같은 엄마 없다."
"응."
사랑이의 담담하던 '응'에 부드러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엄마 한 번 믿어봐. 엄마 전문가야. 응?"
"알았어."
"오케이. 좋았어. 그럼, 다음 질문. 이미 감정 그릇에 쌓인 감정이 많아서 조금만 쌓여도 넘쳐흐를 수 있잖아.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
"... 비워야지?"
"이번에도 정답! 이미 가득 찬 감정 그릇을 비워서 언제 쌓일지 모르는 감정을 위해 여유공간을 만들어야 해. 그럼, 어떻게 비울 수 있을까?"
"아, 몰라."
사랑이의 인내심의 바닥이 힐끗 보여서 '여기서 그만'을 외쳐야 하나 고민했지만 끝을 보기로 했다. 또다시 얘기를 꺼내는 게 더 위험했다. 넌 중2, 눈치 봐야 하는 사춘기니까.
"방법은 사람마다 다양해. 엄마는 스트레스가 심할 땐 아침에 10km를 뛰고 출근했어. 숨이 차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을 때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더라. 어떤 사람은 산에 가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서 풀기도 해. 중요한 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거야. 사랑이는 뭘 할 때 가장 즐거워?"
"친구들과 게임할 때."
"그럼, 지금 사랑이는 친구들과 게임하면서 감정그릇을 비우는 있었던 거네. 좋은 방법이야."
"그렇네."
"자자, 이제 마지막 방법. 이건 엄마가 말해줄게. 오랫동안 물이 담긴 그릇을 방치해 두면 어떻게 되냐면 그릇바닥에 미끈미끈한 물때라는 게 생겨. 그건 물을 버린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더라고. 빡빡 씻어야만 사라져. 감정 그릇도 오랜 시간 채워져 있다 보면 바닥에 켜켜이 쌓이는 게 생겨. 엄마처럼 오랜 시간 감정 그릇을 가득가득 채워온 사람은 심하게 쌓였겠지. 사랑이는 아직 어리니까 쌓인 게 없을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달라. 이해가 돼?"
"조금."
"그래그래. 엄마가 하나하나 설명하느라 길게 말했는데 사랑이는 이렇게 기억해 주면 좋을 것 같아. 마음속엔 감정그릇이 있고, 가득 차지 않게 덜 채우고, 비우고, 닦는다."
"덜 채우고, 비우고, 닦는다?"
"맞아.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에 오래 남지 않게 빨리 흘려보내고, 이미 차버렸으면 비우면 되고, 미처 비우지 못해 바닥에 쌓인 게 있으면 닦아서 없애면 끝이야. 덜 채우고, 비우고, 닦기!"
"응응."
"이런 얘기를 엄마가 하는 이유는 사랑이가 엄마를 많이 닮았으니까, 감정을 눌러 참는 것까지 닮았을까 봐 걱정이 됐거든. 사랑이가 엄마처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어떤 말도 다 괜찮으니까, 엄마한텐 언제든지 해. 짜증 내고 화내도 진짜 괜찮아."
"......"
고개 숙인 채 생각에 잠긴 사랑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가슴엔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사랑아, 엄마가 천천히 보여줄게. 감정 그릇 덜 채우고, 비우고, 닦는 게 어떤 건지.
엄마도 아직 연습 중이야. 그러니까 우리 함께 해보자. 너는 이제 15살이니까 엄마보다 더 빨리 너만의 방법을 찾게 될 거야.
엄마는 언제든지 네 마음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어.
네 곁에서 한 발 물러나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