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미술상담받아볼까?”
“굳이?”
“다 먹었으면 양치하자.”
“귀찮아.”
“1학년은 자율학기제라 적성검사 같은 거 하지 않았어?”
“2학년 때도 했어.”
“어떻게 나왔어?”
“기억이 안 나.”
우리 집 사춘기 딸의 어록 3종 세트다.
“굳이?”, “귀찮아”, “기억이 안 나.”
짧고 간단한데, 이 세 마디면 대부분의 대화가 끝난다.
1. 굳이?
다시 만났을 때, 사랑이는 말수가 거의 없었다. 표정도 어두웠고, 답은 늘 “응” 아니면 “아니.” 여중생 특유의 깨발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사랑이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겹쳐 보여 마음이 쓰였다. 말을 삼키고 잘 참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던 마음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 끝이 어땠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우울증, 공황장애, 번아웃, 대인기피... 심지어 기억이 사라지는 가성치매까지 겪었다. 몸은 늘 두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그래서 사랑이도 비슷한 길을 걷지 않을까 겁이 났다.
속 마음은 신경정신과에서 진단을 받아보고 싶었지만, 미술상담이라면 아이도 가볍게 받아들일까 싶어 제안했지만 사랑이의 대답은 단호했다.
“굳이?”
“엄마는 사랑이가 속마음을 혼자만 꾹 참다가 아프게 될까 봐 걱정돼. 한 번만 가보면 안 될까?”
“아니.”
여기서 더 밀면 관계에 금이 갈 것 같아 전략을 바꿨다.
“사랑이가 엄마랑 살려면 소송을 해야 하잖아. 그때 엄마 얘기만으론 부족한데, 상담 선생님 의견은 도움이 될 수도 있어. 거짓말할 필요 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돼.”
사랑이 눈빛이 흔들리더니, 마침내 짧게 말했다.
“… 알았어.”
‘굳이’가 ‘알았어’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2. 귀찮아
점심을 먹자마자 사랑이는 쿠션에 기대어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사랑아, 양치하자.”
“점심은 안 해도 되잖아.”
이건 또 무슨 논리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먹었으면 양치’가 자동 세트 메뉴였다. 그런데 집에 칫솔이 있는데 왜 안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음식 먹었으면 양치해야지.”
“계속 먹으면 안 해도 되지?”
아니, 이런 기상천외한 논리라니.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꾹 참았다.
“응. 다 먹고 양치하면 돼.”
그러자 아이는 포카칩 봉지를 들고 와서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밥을 먹은 직후인데, 굳이 과자를 꺼내온 이유가 ‘양치를 미루기 위해서’라니. 이건 창의성의 새로운 활용이 아닌가.
잠시 후, 비닐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해졌다.
“다 먹었으면 이제 양치하자.”
“귀찮은데.”
웃음기는 빼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이 아픈 거 싫어하잖아. 치과 가면 아프고, 여러 번 가려면 더 귀찮을 텐데.”
대답은 없었다. 잠시 후 욕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전 성공.
3. 기억이 안 나
책 한 줄 읽지 않고, 유튜브와 게임에 빠져 있는 사랑이를 보며 궁금해졌다.
“사랑이 꿈은 뭐야?”
“없어.”
“하고 싶은 건?”
“없어.”
“잘하는 건?”
“없어. 난 잘하는 게 없어.”
나는 속으로 '아닌데...'를 외쳤다.
어릴 적 사랑이는 미술도, 과학도, 운동도, 독서까지 잘하는 아이였다. 사랑이와 같은 나이의 딸이 있던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학부모 상담 날 내게 사랑이는 무슨 학원에 보내냐며 부럽다고 했을 정도였다. 왜 다 잊은 걸까.
“자율학기제 할 때 적성검사 했잖아. 결과 뭐라고 나왔어?”
“이번 학기에도 했는데… 기억이 안 나.”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비어 있는 눈동자엔 진심이 스쳤다.
“이번 학기에 한 게 기억 안 나면 어떻게 해?”
“어제 한 것도 잘 기억 안 나는데.”
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농담을 던졌다.
“사춘기 아니라 갱년기 아니야?”
사랑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도 어제 일이 기억이 안나거든. 엄마랑 증상이 같네. 우리 사랑이?”
내가 사랑이 빤히 쳐다보며 킥킥거리며 웃자 사랑이도 따라 웃었다.
검색해 보니 사춘기 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불안했다. 나 역시 스트레스가 심할 때 기억이 툭툭 끊겼으니까.
굳이, 귀찮아, 기억이 안 나.
사춘기 딸의 반항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나도 자주 쓰는 말이다.
맛집이라며 긴 줄을 서라고 하면 “굳이?”라고 묻고, 운동하라고 하면 “귀찮아”라고 투덜댄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잠시 멈칫하며 “뭐 하러 왔더라?”하며 빈 손으로 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사랑이가 툭 내뱉는 그 말들이 낯설지 않은 건, 결국 내 삶 속에도 똑같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는 솔직하게 말하고,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그래서 이제 아이에게 '해야 해'보다는 '이래서 좋을 것 같은데'라고 내 생각을 담담하게 말한다. 받아들일지 말지는 사랑이가 정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나는 얼마나 솔직하게 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