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의 말에 세상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5점?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사랑아, 이번 기말고사에서 영어를 5점 맞았다는 거야? 100점 만점에?"
"응."
100점 만점이 맞았다. 5점이라니... 차라리 50점이라고 했으면 ‘영어가 좀 어렵구나’ 하고 생각했을 텐데. 화도 나지 않고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세상에, 5점은 어떻게 하면 맞을 수 있는 거야? 답 사이를 막 비켜갔네.”
"… 외울 게 너무 많아."
사랑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영어와 과학은 외울 게 너무 많아서 귀찮다며 투덜거렸다.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영어 성적은 5점, 과학 성적은 3점이라고 했다. 나중에 나이스 대국민 서비스에서 확인해 보니, 답을 모두 체크했는데도 5점이었다.
"영어가 외울 게 그렇게 많아?"
“그렇다고!”
사랑이의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나는 학창 시절에 영어가 어렵지 않았다. 대신 수학이 너무 싫었다. 소위 '수포자'였다.
"엄마는 중학교 때 수학이 너무 싫었어. 이해가 안 되더라고. 차라리 외우는 게 훨씬 쉬웠어. 그래서 수학을 포기했지."
"수학은 그냥 풀면 되는데?"
"그러니까. 엄마는 그게 안 풀려서 포기했다니까."
수포자인 게 마치 자랑이나 되는 듯 당당하게 웃으며 말하자, 사랑이도 피식 웃었다.
"사랑아, 사람은 이과형 머리와 문과형 머리가 나뉘는 것 같아. 둘 다 잘하는 건 어렵지. 사랑이는 수학을 좋아하잖아. 그래서 외우는 걸 싫어하나 봐."
"응..."
살짝 의기소침한 사랑이의 대답을 들으면서 마음이 묘했다. 사랑이가 바라는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생각이 복잡했다.
"언제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 와... 엄마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배웠는데. 요즘은 영어를 일찍 배우는구나."
"옛날 사람..."
"뭐? 하긴, 엄마 옛날 사람 인정!"
소심하게 작게 말하는 사랑이의 말에 나는 웃으며 쿨하게 옛날 사람임을 인정했다.
사랑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빠와 살기 시작해서, 그 후로는 사랑이의 공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공교육을 받았으면 벌써 6년째인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배운 영어와 지금 사랑이가 배우는 영어의 난이도 차이가 상당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중학교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영어 문제집을 샀다. 수능 이후 영어 공부를 해본 적도, 공인영어시험을 본 적도 없으니, 이 정도면 사랑이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만한 상태였다. 와... 정말 어려웠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문제집을 다시 사고, 초등학교 영문법 책도 샀다. 쉽게 풀 수 있을 거란 생각 했지만, 중학교 1학년 1학기 기출문제조차 두세 개씩 틀렸다. 멘털이 조금씩 흔들렸다. 내가 기억하는 중학교 영어 난이도가 아니었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 준비 전 30분씩 문제집을 풀고 있다. 사랑이는 책꽂이에 꽂아둔 문제집을 슬쩍 쳐다봤을 뿐 별말이 없었다. 내가 어렵다고 푸념하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며칠 후, 사랑이 친구와 셋이 떡볶이를 먹다가 영어 공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사랑이는 초등학교 때 알파벳을 배우면서 'OPQR'에서 영어를 포기했다고 했다. 영어 학원도 아니고, 영어 캠프도 보내줬는데 알파벳에서 포기했다니...
그때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사춘기 시절, 내게 무심한 부모님께 반항하듯 비 오는 날이면 일부러 우산과 책가방 속 짐을 사물함에 넣어두고 비를 맞으며 집에 가곤 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서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온몸이 흠뻑 젖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깜짝 놀라시며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줄 몰랐어. 알았으면 데려갔을 텐데...”라며 미안해하셨다. 그 후로는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면 우산을 챙겨주셨고, 하교 시간에 맞춰 깜깜한 교문 앞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아직까지도 부모님께 사물함에 늘 우산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어쩌면 사랑이의 5점이라는 성적도 그때의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답을 알 수 없지만 천천히 그 마음을 헤아리며 스스로 감정을 표현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영어 성적 5점.
말로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숫자 같아서,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