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부안바조 공항에서 만난 호의들.
7시간이 걸려 도착한 발리 국제공항.
비자구매와 입국 심사를 위해 몰려든 다양한 사람들과 뒤엉켜 피곤한 줄도 모르고 공부해 온 것들을 하나하나 수행한다.
옛날엔 달러로 바꿔와서 현지통화로 환전을 했는데 요즘엔 트레블 월렛이라는 카드로 현지에서 바로 현지 통화를 인출해서 쓸 수 있어서 수수료도 저렴하고 아주 편리했다.
다만 카드를 먹는다던지, 돈이 안 나온다던지, 카드가 복제된다던지 하는 후기가 있어서 긴장은 했지만 우리 모녀 여행의 시작은 남편이 함께 해주어 조금 수월했다.
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 남편은 여행사를 다니면서도 정작 본인은 여행할 시간이 나지 않는 한창 일해야 하는 시기의 가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3일이라는 휴가를 써서 우리와 함께 발리에 왔다.
사실 비행시간을 고려하면 전혀 효율적인 동행이 아니었지만, 아이가 아틀라스 나방을 아빠와 함께 보길 원했고, 단 한순간이라도 발리에 함께 있길 원했기 때문에 극한의 스케줄에도 함께 해준 남편.
남편이 있는 사흘 동안은 아이가 원했던 나비공원에 가서 소원했던 아틀라스 나방도 보고 황금볏 과일박쥐도 만났다. 그리고 현지에서 세탁서비스를 맡기고 찾아보는 것과 숫자와 돈에 약한 내가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잘 찾는지 계산은 잘하는지 체크해 주었다.
좋은 리조트에서 수영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사지도 즐기고 그렇게 짧은 일정뒤,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드디어 딸과 단둘이 제대로 된 여행이 시작된다.
남편이 돌아간 다음 날 우리도 짐을 꾸려 호화리조트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른다.
발리 국제공항의 국내선은 국제선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고 정말 완벽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 처음 들었던 것 같다.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해외에서 국내선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보는 건 또 처음 해보는 일이라 긴장감에 일찍 도착했더니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네시아어와 빠른 영어만 들리던 국내선 공항.
비행기가 계속 지연출발이 되어 꽤 오랜 시간을 공항에서 대기해야 해서 지루할 법도 한데, 코모도 드래곤을 보러 갈 생각에 기분이 좋은 딸아이는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잘 기다려주었다.
발리에서 약 1시간 15분 정도 날아가서 도착한 인도네시아 누사뜽가라 지역의 플로레스섬, 라부안바조.
비행기가 도착하고 앞자리부터 차례대로 내린다, 아이도 챙겨야 하고 가방도 챙겨야 해서
천천히 내리려고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 앞자리 승객들이 다 내린 상황이 되자 뒷분들이 나와 딸아이가 내릴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여유 있는 상황은 또 처음 겪는지라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선반에서 배낭을 꺼내려는데, 내 작은 키로는 비행기 선반 위에 있는 가방도 스스로 꺼낼 수가 없었다. 까치발을 들어도 손끝에 배낭끈이 닿을락 말락 나를 약 올린다.
어째 첫 시작부터 내가 이렇게 나약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려는 순간 바로 옆에 있던 키 크고 훤칠한 외국인이 가방을 꺼내주었다. 뒤에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까지 해주는 걸 보고 머쓱 해졌지만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인사하고 아이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다.
서로 먼저 내리겠다고 밀치고 양보하지 않는 비행기 착륙 장면만 경험해 본 나는, 이 상황의 잔상이 꽤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첫 숙소는 항구 근처에 있는 작은 호스텔인데, 공항 택시들을 요금담합이 있으니 50k에서
흥정을 잘해서 타고 오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아니 그런데, 택시 스테이션에서는 처음부터 70k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너무 비싸~ 마할~ 어린아이도 있고 시간이 늦었으니 50k에 가자!" 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흥정을 시도해 보았으나 단칼에 거절당한 우리 모녀.
나도 왠지 자존심이 상해 몇 번 흥정하다 포기하고 아무 택시나 타지 뭐 하고 공항 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아무도 우리 모녀에게 택시를 타겠느냐 호객도 하지 않고 각자 맡은 손님들을 태우기에 바빴다.
화를 조금 가라앉히고 다시 택시 스테이션으로 가 한수 접고 "그래 70k에 가자"라고 했는데
이번엔 모든 드라이버들이 이미 운행 중이라 기사가 없으니 기다리라고 한다.
하하하. 어째 여행 시작부터 삐그덕 삐그덕 쉽지 않다.
긴장감에 힘든 줄도 모른 채로 텅 빈 공항에서 아이와 함께 이곳저곳 둘러보며 기다리고 있으니
혼자 여행온 듯한 외국인이 우리에게 사진 찍어줄까? 하고 물어봐주어 아이와 둘이서 사진도 한 장 남겼다.
긴장을 많이 했는데 때마다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들 덕분에 용기를 냈다.
가끔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을 수 있고 날이 좋지 않으면 배가 뜨지 않을 수도 있고
한국인들의 여행후기는 전무한 이곳에 이곳에 간다고 했을 때 남편의 반응은 위험해서 안된다. 였다.
허락받기 위해 수개월을 조르다가 안 되겠다, 어차피 발리 있다가 내가 저길 이미 가있다고 하면
잡으러 올 거야 어쩔 거야, 하고 어느 순간 코모도섬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매일 같이 코모도섬 타령을 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지자 나의 이런 생각을 읽은 건지
"차라리 말을 하고 가라, 내가 졌네 졌어. 대신 공부 많이 하고 가, 너무 허름한 호텔 가지 말고 좋은 숙소로 가, 투어도 제일 비싼 걸로 해" 라고 백기를 든 남편.
하하하. 고작 10여 년 함께 살았을 뿐인데 나를 알아도 너무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