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한 지 두 달 만에, 우리는 결혼을 결심했다. 비혼주의를 고수하던 남자친구가 결혼을 결심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나에게도 결혼은 그보다 더 큰 결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결혼'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상처와 두려움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다. 온 나라가 IMF로 힘들어하던 시기,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식당이 망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면서 부모님의 관계도 결국 파국을 맞았다. 무엇보다 성격 차이가 너무나 컸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 큰소리로 싸우셨고, 그 광경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주차된 차 안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하려고 다가갔는데,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나를 발견하시고는 황급히 눈물을 훔치며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려 하셨지만, 그 모습에 내 가슴은 더욱 아려왔다. 그날 나는 어머니가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무게를 지고 계신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오빠와 나를 한 카페로 데려가 조용히 물으셨다.
“엄마가 잠시 떠나 있어도 되겠니?”
둔한 오빠는 어머니의 물음이 얼마나 무겁고 절박한 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각자 얼마나 힘겹게 견디고 있는지를. 두 분이 이렇게 계속 싸우면서 살아간다면, 그 스트레스가 결국 부모님 모두를 병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쳐갔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슬픔을 억누른 눈빛을 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응, 우린 괜찮아! 엄마, 가도 돼!”
그렇게 어머니는 짐을 싸서 떠나셨다.
어머니가 안 계시는 집에서 집안일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와 청소까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쉴 틈도 없이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 가끔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묵묵히 그 모든 책임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며 나 자신을 설득하면서.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결국 살고 있던 집마저 넘어가고 말았다. 그 후 우리는 컨테이너 2개를 이어 만든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처음엔 물조차 나오지 않아, 한겨울에 옆 공장 수돗가에서 찬물로 씻어야 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손발이 저릿하게 얼어붙었지만 그조차도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갑게 얼어붙은 손발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변해가는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는 점점 무너져 내리셨다. 매일 술에 의지하셨고, 밤마다 울부짖듯 한탄하셨다. 아버지의 짜증과 분노는 나에게 쏟아졌고, 마치 끝이 없는 어둠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아버지가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버거웠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꼭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부정적으로 변하실수록 인자하게 웃어주시던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특히 어머니와 자주 같이 가던 공중목욕탕을 지나칠 때마다 '어머니가 있었으면 같이 갔을 텐데' 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공중목욕탕에서 어머니는 내 살이 다 벗겨지도록 때를 밀어주셨는데 그 아픈 순간마저도 그리웠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그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어느 날, 오랜만에 어머니가 차를 몰고 학교로 오셨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를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오빠와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차에 올라탔다. 싱글벙글 대며 안전벨트를 매고 출발하는 순간,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아버지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우리를 발견하시고는 차를 휙 돌려 어머니의 차를 쫓기 시작했다. 경적을 울리며 끊임없이 따라오는 모습은 마치 영화 속 007 추격전을 보는 듯했다. 30분 동안 아슬아슬한 추격전이 이어졌고, 결국 어머니는 한 식당 앞에 차를 세우셨다. 아버지도 곧바로 그 옆에 차를 멈췄다. 상황이 심각해질 것 같아, 나는 위기감을 느끼고 '식당에서 밥이라도 먹으며 얘기하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대화는 전쟁과 다름없었다. 두 분은 마치 전세라도 낸 듯, 식당 안에서 크게 다투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금 ‘이래서 두 분이 함께 있는 건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다시는 우리를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 말이 나와 오빠의 마음에 깊게 박혔다. 우리는 그저 그런 상황에 지쳐있었다. 어머니는 체념한 듯 그날 다시 떠나셨다. 당시엔 핸드폰도 없었고, 우리는 어머니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날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의 무거운 체념과 아버지의 끝없는 분노를 바라보며, 두 분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상처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며, 어린 나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마침내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다시 일어나셨다. 오랜 시간 힘들어하던 아버지가 새롭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너무나 컸다. 부모님의 불화와 이혼, 그리고 아버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집안의 무거운 책임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청소년 시절.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을 잊고, 매일 현실과 싸우며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결혼'과 '가정'에 대한 모든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고, 사랑이란 결국 일시적이고 사라지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았다.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고, 환경이 바뀌면 관계도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이른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남자친구를 만나면서였다. 차분하고 매사에 침착할 뿐 아니라 절대 화를 내지 않으며,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던 그는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방어 기질이 강했던 나였지만,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열렸다. 그의 일관적이고 배려 깊은 작은 행동들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믿음의 증거처럼 다가왔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의 벽들이 빠르게 허물어졌다. 가정 불화를 겪은 나는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아야 좋은 것'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런 나조차도 그와 함께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나에게 나의 과거와 마주하고 극복하려는 용기에 대한 선물 같았다.
정말 다행히도, 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된 후 외면뿐 아니라 내면까지 아름다운 분과 재혼하셨고, 덕분에 나에게는 마음이 잘 맞는 의붓언니와 의붓남동생도 생겼다. 가족이 다시 확장되는 게 낯설 줄 알았는데, 그들과의 유대감은 오히려 새로운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줬다. 어머니 또한 후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성품을 가진 분과 재혼하셔서 제주도의 한적한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계신다. 새아버지는 누구보다 사랑이 많으시고 배려 깊은 분이셔서, 어머니와의 조화로운 일상이 나에게도 큰 위안과 안정을 주었다. 어머니가 새아버지와 함께 편안하고 웃음 가득한 삶을 사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 깊숙이 '가정'에 대한 믿음과 안정감을 다시 찾게 된 것 같았다.
남자친구는 내 사정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지만, 별말 없이 묵묵히 나를 지지해 주었다. 그는 내가 이렇게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며, 힘든 시절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 자란 것은 그래도 부모님 덕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을 직접 만나 뵙는 것이 자신에게는 큰 영광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남자친구의 말이 맞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큰 버팀목이시고, 어머니는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베스트프렌드로서 항상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지지해 주시고 응원해 주셨다. 비록 아버지와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이 나를 더 독립적이고 강하게 만들었고, 어머니와의 이별의 그리움은 오히려 나를 더 열심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모든 과정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부모님이 각자의 위치에서 주신 사랑과 지지는 내가 이 순간까지 올 수 있었던 큰 힘이 되었다.
그런 부모님께 내가 평생 함께할 사람을 소개한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나는 한 번도 내 남자친구를 데려가 본 적도, 소개해 본 적도 없어서,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엄청 떨렸다. 그리고 두 팀의 부모님께 알리려면 고군분투가 불가피했다. ‘부모님 소개의 대장정’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첫 번째 미션으로 포천에 계신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먼저 찾아뵙기로 했다. 남자친구는 우리 부모님께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셔츠를 새로 사 입고, 선물까지 준비했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신경을 쓴다고 셔츠 색깔부터 버튼 하나하나까지 고민하며, ‘이건 절대 실수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장만했다. 선물은 정말 고민 끝에 고른,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실속 있는 아이템으로, 그야말로 ‘완벽한 데뷔전’을 준비했다. 흥분되는 마음으로 포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우리는, 이번 만남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것임을 자명했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채, 드디어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맞이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마음속으로 ‘아버지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 중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옆에서 나를 빤히 보더니 느닷없이 말했다.
"나 당신을 사랑해!"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몇 초 후 나도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근데 웃긴 건, 그날이 우리가 서로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은 날이라는 거다.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싶었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해"라는 말도 안 하고 결혼부터 결정해 버렸다... 한마디로, 사랑한다는 말도 없이 결혼할 생각부터 하다니, 정말 특이한 커플이다. 사실, 그때까지 우리는 말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 온몸으로 사랑을 다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한 집착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가끔 그날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아니, 결혼이 먼저고 사랑 고백이 나중이라니! 이게 정상 순서냐고!
이후 우리는 버스에 올라탔고,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나 오래됐는지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부터 사랑한다고 느꼈어?"라는 질문과 “정말 언제 말할까, 고민이 많았지!”라는 속마음도 풀어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가 무슨 질문을 던질까?” 하며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을 연습하기도 했다. 웃음을 터뜨리며 연습을 하던 중, 우리는 이 순간이 우리 인생의 큰 전환점이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실감하며 서로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대구 출신이신 우리 아버지는 워낙 무뚝뚝하고 다혈질이셔서, 사실 나는 살짝 긴장했다. 드디어 버스가 포천에 도착했고 아버지께서 버스정류장까지 차를 끌고 마중 나오셨다. 예비 사위가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드렸는데, 아버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시고 그냥 “어, 타라” 하셨다. 그렇게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살얼음판이었다. 가는 길에 긴장한 탓인지 나도 모르게 재잘재잘 떠들어 댔고 아버지께 "남자친구 어떤 거 같아요?" 하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은 딱 한 마디.
"두고 봐야 알지!"
역시나 아버지답게 호락호락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버지의 여동생인 내 고모가 미국분과 결혼해서 잘 살고 계신 덕분에, 아버지는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은 전혀 없으셨다. 그런 면에서는 조금 안심이었다.
아버지와 남자친구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은 어색함이 가득했다. 둘은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내가 중간에서 통역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부모님의 질문들로 예비 사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뭐 하시나?” 아버지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물으셨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세요,” 남자친구는 조금 긴장한 듯 정중하게 답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으셨다. “형제는 있고?”
“네, 9살 많은 형이 하나 있습니다. 형수도 있고요.” 남자친구가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버지는 직업을 묻는 질문으로 넘어가셨다. “일은 무슨 일 하는데?”
남자친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마케팅과 세일즈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살짝 무게를 잡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다. “둘이 앞으로 어디서 살 생각이야?”
“한국에서 살 계획입니다. 이미 회사에는 얘기해 두었어요,” 남자친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을 잇지 않으셨다. 나는 숨을 고르며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짧지만 강렬했던 면접 아닌 면접이 끝나고, 아버지는 우리를 한우식당으로 데려가셨다. '한우를 사주신 다는 건 마음에 드신다는 건가?'라고 내심 긍정회로를 돌렸지만 그때 우리는 둘 다 고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지는 모르게 긴장을 하며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질문들 빼고는 별다른 걸 물어보시지 않아서 궁금한 게 더 없는지 여쭤보니 아버지가 대답하셨다.
“내가 어차피 뭘 물어봐도 네가 통역하면서 다 좋게 포장해서 얘기할 텐데 물어보나 마나지.. 술이나 받아!”
맞는 말씀이셨다. 아버지는 나를 아주 정확히 알고 계셨다.^^ 하여 아버지는 질문 대신에 술을 많이 따라주셨다.
남자친구는 사실 한국에서 어른과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서 술 예절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아버지께서 술 예절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올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서 술을 마시는 그 모습을 보니, 뭔지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미래의 장인, 아니 '한국 아버지'한테 배우는 술이라.. 나에게는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렇게 어른 앞에서 술을 따르고, 분위기 맞추는 남자친구를 보며 뭔가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남자친구의 진심 어린 몸짓 덕분에 아버지의 마음도 서서히 열리는 듯했다. 다행히도 남자친구는 주사가 전혀 없어서, 술자리는 끝내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다음 날 아버지께서는 "두고 봐야 알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셨지만, 그래도 그날의 술자리에서 아버지와 남자친구는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리 집은 그야말로 작은 동물원처럼 시끌벅적해졌다. 내 남자친구를 만나 보기 위해 가족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오빠, 새언니, 의붓언니와 형부, 조카, 그리고 의붓남동생까지 모두 집결했다. 저마다 코 큰 외국인, 그야말로 ‘코큰이’의 정체를 파헤쳐 보겠다는 결심이 대단해 보였다. 처음엔 남자 친구가 이 큰 가족 앞에서 좀 긴장한 것 같았지만, 다행히 우리 가족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비록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웃음과 몸짓으로 소통하는 마법이 펼쳐졌고, 남자 친구는 한국어 몇 문장을 배우면서 우리 문화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특히 저녁이 되자 마당에서 삼겹살 파티가 벌어졌는데, 그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가족 전체가 소주잔을 들고 “짠!”을 외치며 진정한 한국식 환영식을 벌인 것이다. 가족들 모두 술 몇 대 병은 기본인 주당들이라 남자친구는 이때쯤 어질어질했겠지만,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게 한국의 환대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 조카는 그를 마치 크리스마스에 온 산타클로스처럼 여기며 수염을 신기해하며 만지작거렸고, 의붓남동생은 우리의 전통 놀이인 윷놀이를 가르쳐 주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 친구는 우리 가족의 따뜻함과 유쾌함에 깊이 빠져들었고, 마침내 '나도 이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라는 결심까지 하게 된 것 같았다.
견고하시던 아버지도 예비 사위가 가족들과 어울리며 농담까지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으셨다. “우리 사위 될 놈, 은근히 입담이 좋네.”라며 마음을 열기 시작하신 걸 보니, 나도 안심이 되었다. 남자친구 역시 이번 만남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한국 생활? 이제 두렵지 않아. 오히려 기대돼!”라며 나와 함께할 미래에 대해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가족에게도 이번 만남은 뜻깊었다.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면서 서로의 문화와 마음을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니까. 삼겹살 파티를 할 때, 남자친구가 젓가락을 힘줘서 사용하다가 손가락에 쥐가 나 다들 웃음이 터졌지만, 그 모습도 이제는 정겹게만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완벽한 일원이 된 것 같았다. 심지어 아버지도 “다음에 또 소주 한 잔 하게 데려와.”라고 하셨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가족 모두가 남자친구를 따뜻하게 받아들인 덕분에, 이방인이 아닌 진정한 우리 집 사람으로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첫 번째 가족과의 만남을 무사히 마친 후, 우리는 제주도로 날아갔다. 이번엔 두 번째 타자인 어머니와 새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남자 친구에게 내 부모님과 더불어 제주도의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와 새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환한 미소로 달려오셨다. 남자 친구가 외국인이라 조금 어색해하시려나 했는데, 웬걸, "생긴 것도 귀엽고 한국에 금방 적응할 것 같은데?"라며 웃으셨다. 게다가, “외국인 예비 사위라 더 친구처럼 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라는 말씀까지 하시는 게 아닌가.
남자 친구는 마치 전생에 그들의 자식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머니는 미리 한상 가득한 한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놓으셨는데, 우리는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맛있게 먹었다. 남자 친구는 어머니의 요리에 감동해 한국의 식사 문화를 열심히 칭찬했다. 특히 개인 접시에 음식을 나눠 먹는 대신, 모두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한국 식습관이 너무 따뜻하고 정감 있게 느껴진다고 했다. 한 번의 식사로 한국 문화와 가족애에 한층 더 빠져들게 된 남자 친구는 “이래서 한국 음식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나 봐요!”라고 너스레도 떨었다.
다음 날,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제주도 투어, 우리가 책임진다!'며 자칭 여행 가이드를 자처하셨다. 여행을 너무나 사랑하는 내 남자친구는 그 소식을 듣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바로 제주시 북쪽에 위치한 함덕 해변. 검은 화산암과 하얀 모래가 어우러진 이곳은 정말로 '여기가 한국 맞아?' 싶을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사실 나도 한국에 이렇게 멋진 해변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남자친구는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대며 해변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았다. 우리는 해변에 인접한 카페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았고, 나는 순간 ‘이거 약간 외쿡 감성인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도 "제주도, 앞으로 내 단골 휴양지 될 것 같은데?"라고 하며 아주 만족해했다.
다음 날엔 서귀포시로 향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는데, 가는 곳마다 풍경이 바뀌어 눈이 쉴 틈이 없었다. 푸른 바다와 녹음이 어우러진 길을 달리며, 기분이 절로 상쾌해졌다. 한라산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가운데서 우뚝 서 있어서 뭔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한라산이 나만의 내비게이션이 된 것처럼 말이다. 서귀포는 제주시보다 더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높은 야자수들이 곳곳에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남자친구는 "이거 뭐, 제주도 매력 넘친다!"라며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도 이곳이 과연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첫 번째 코스인 정방폭포에서는 물이 쏟아지듯 내리치며 대자연의 웅장함을 뽐냈고, 물보라가 얼굴에 살짝 닿을 때마다 '이 맛에 여행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특히, 그 상쾌함이 여행의 피로를 싹 날려주는 기분이었다. 그다음으로 간 황우지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진짜 '선녀탕' 같은 곳에서 자연의 신비로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정말 선녀가 나와서 목욕을 하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세 번째로 향한 주상절리에서는 "와, 자연이 이런 걸 만들었다니!"라며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다. 마치 거대한 조각 작품을 보는 듯한 그 모습에, 내가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작은 존재임을 실감했다. 서귀포의 모든 곳이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여행 다큐멘터리 같았고, 남자친구와 나는 끝없이 놀라움과 감탄을 이어갔다.
이후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해안 절벽에 위치한 한 카페에 앉아 풍경을 즐기며 간식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탁 트인 바다와 그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배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여유로운 분위기를 더해줬다. 저 멀리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까지 들려오니, 이곳에서의 시간은 마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작은 쉼표 같았다. 신선한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우리는 자연 속에서의 평온함을 만끽하며 대화를 나눴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고 그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투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코스는 중문색달해변! 피곤했지만, 우리에겐 포기란 없지!
중문 색달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남자친구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여기는 함덕해변이랑 완전 또 다른 분위기네, 뭔가 더 힙해!"라고 흡족해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더니 바로 바닷바람을 느끼며 두 팔을 쫙 벌리고 "여기가 바로 진짜 천국이지!"라고 외치며 환하게 웃었다. 바다 색깔도 청명하고 해도 지고 있어 마치 그림 속 풍경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고, 우리 둘 다 한동안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앉아서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잔잔한 파도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해변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오는 길에 채집을 마치고 바다에서 나오는 해녀들이 보였고 왠지 신선한 해산물향이 나는 것 같아 내 발길은 그곳으로 향했다. 거기서 우리는 해녀들이 갓 잡은 신선한 해산물을 시켜 먹었고, 남자친구는 처음 보는 멍게를 보고 외계 생물 같다며 기겁했지만 반대로 해산물 킬러인 나는 "여기가 진심 찐맛집!"이라 하며 마음껏 즐겼다.
남자친구는 싱싱한 해산물보다는 제주 해녀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제주 해녀들이 바다에서 거친 환경 속에서 일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전통을 이어가는 모습이 매우 강인하고 존엄한 느낌이라며 그들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해녀들은 숨이 닿는 데까지만 채집하고, 자연과 공존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아. 마치 바다와의 평화로운 동맹을 맺고 사는 것처럼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자연을 존중하며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해녀들의 삶의 방식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현대 사회가 자원을 무한히 소비하는 데 익숙해져 가는 반면, 해녀들은 환경을 보호하며 필요한 만큼만 얻는다는 점이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는 해녀들의 이러한 철학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감명 깊게 이야기했다.
마지막까지 숨 돌릴 틈 없이 신나게 달렸던 투어, 그 덕분에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꽉 찬 하루였다. 남자친구는 제주도 자연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에 끊임없이 감탄하며 이제야 "제주도! 제주도!" 하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100% 이해하게 됐다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남자친구는 어머니와 새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며, 다음번엔 그의 부모님이 한국에 오시면 제주도의 동쪽과 서쪽, 숨겨진 명소까지 모두 안내해 드리자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웃으며 "그럼 난 미리 숙소부터 예약해 놓아야겠네!"라며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남자친구는 창밖을 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국 부모님들이 자녀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는지 들어서 걱정도 했는데, 네 부모님께서 날 이렇게 따뜻하게 맞아 주셔서 정말 큰 감동을 받았어. 이건 정말 축복이야." 그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고, 나 역시 그 순간이 우리가 새로운 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따뜻한 믿음의 시작임을 느꼈다. 가족과의 모든 순간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