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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르셀로나에서 마주한 뜻밖의 현실

by 루미나라 Dec 15. 2024

바르셀로나 여행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 뜻밖의 소식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뉴스였다. 바이러스는 이미 중국의 상황을 통제 불능 상태로 몰아넣었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으로도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적으로 부모님 걱정이 밀려왔다. 우리는 즉시 부모님께 연락해 마스크를 꼭 착용하시고 외출을 삼가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집어삼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바르셀로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우리는 관광지와 맛집을 탐방하며 도시의 매력을 만끽했지만, 점차 바이러스 확산 소식이 유럽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항과 기차역에서는 방역 조치가 강화됐고,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설마 여기가 위험해지겠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느새 우리의 여행 일정에도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유럽에서 감염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약국을 돌아다니며 마스크를 구하려 했지만, 유럽에서는 마스크가 아예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약국의 약사들조차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2020년 3월 11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를 공식적으로 팬데믹으로 선언하면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들었다. 스페인에서도 감염자가 급증하며 뉴스를 틀 때마다 바이러스 관련 보도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상황은 날로 악화됐다. 슈퍼마켓의 진열대는 텅 비었고, 특히 화장지 같은 물품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는 빠르게 퍼졌고, 마치 재난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일 감염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결국 스페인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도시 봉쇄령이 내려졌고, 통행금지령이 시행된다는 뉴스를 보며 우리는 현실감을 잃었다. 외출은 식료품과 의약품 구매에 한해 허용된다는 말이 뒤따랐다. 뉴스 화면 속 스페인의 거리는 텅 비었고, 사뭇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그제야 여행이 끝났음을 실감했고 일정보다 더 일찍 돌아가려고 급히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공권 검색 사이트와 앱을 열어봐도 한국행 비행기 일정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예약해 둔 비행 편마저 취소되었다는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항공사에 전화했지만 몇 시간째 대기만 걸려 있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항공편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모든 것이 마비된 상황에서 우리는 점점 더 절박해졌다. 화려한 바르셀로나의 거리와 매력적인 풍경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오직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던 그 순간, 세상이 얼마나 쉽게 멈춰 설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무방비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바이러스 확산 속에서도 일단 살아남으려면 식료품을 사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마스크가 없다는 것. 마스크 없이 밖에 나간다는 건 당시로선 목숨을 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혼자 마트에 다녀오겠다고 나섰지만, 나는 걱정이 앞섰다. “비닐봉지라도 써! 비말로 전염된다잖아.” 그 말에 남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진짜로 비닐봉지를 꺼냈다. 머리에 맞는 봉지를 고르고, 눈구멍 두 개를 뚫은 뒤 머리에 씌운 그는 마지막으로 선글라스까지 착용하며 완벽한(?) 생존 룩을 완성했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당시엔 그야말로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섰다.


남편은 그렇게 비닐봉지를 쓴 채 식료품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중간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경찰이 나타나더니 스페인어로 남편에게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의 남편을 의심한 것이 분명했다. 남편은 초급 스페인어를 총동원해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음식을 사러... 나왔다. 마스크... 없어서... 비닐봉지!” 그는 어눌한 발음으로 최대한 진지하게 말했지만, 상황은 우스꽝스러움을 넘어선 혼란 그 자체였다. 경찰은 남편의 황당한 차림새를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빨리 필요한 물건만 사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했다.


그렇게 고생 끝에 남편은 식료품을 사 들고 돌아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그를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비닐봉지 속에서 나온 남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는 봉지를 벗으며 한마디 했다.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아...”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지만, 그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감정이 있었다. ‘남편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지?’ 고생하며 식료품을 구해온 그의 모습이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 없었다.

위기 속에서 비닐봉지를 쓴 남편의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 그의 비장한 눈빛과 땀범벅 얼굴은 우리에게 생존의 한 페이지를 선물했다. 어쩌면 가장 우스운 순간이 가장 진지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는 그의 존재에 감사했다.


비닐봉지 마스크로 잠시 버텼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식료품을 온라인으로 주문하기로 결심했다. 주문 과정은 마치 미로를 헤매는 듯 복잡했고, 실패가 반복되면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알고 보니 문제는 스페인에서 발급한 신용카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남편의 스페인 친구가 구세주처럼 나섰다. 그의 신용카드 정보를 빌려 그의 도움으로 주문을 마칠 수 있었고, 식료품 배달 차량이 도착했을 때, 우리는 마치 전쟁에서 물자를 보급받은 것처럼 안도했다.


하지만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도착한 모든 패키지를 설거지 세제로 하나하나 꼼꼼히 씻었다. “혹시라도 바이러스가 묻어 있으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 손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매끈해진 과일들과 깔끔하게 씻긴 식료품들을 보며 겨우 마음이 놓였다. 당시엔 과하다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예방 조치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도시 봉쇄는 당초 2주로 예상되었지만, 어느새 4주, 6주로 길어졌다. 비행기표는 여전히 구할 수 없었고, 숙소를 어쩔 수 없이  계속 연장해야 했다. 집 안에 갇힌 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크게 바뀌었다. 다행히도 위층에 작은 옥상이 있었기에, 매일 그곳으로 올라가 햇빛을 쬐며 몸을 움직이는 것이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유라는 말이 무색하게, 좁은 옥상에서 빙글빙글 돌며 운동을 할 때면 기분이 복잡했다. 아래로 보이는 거리 풍경은 너무나 적막했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바르셀로나의 거리는, 이제 텅 비어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 황량한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를 지지하며 버텼다. 하루하루 갇힌 생활은 지쳤지만, 남편과 함께라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되었다. 봉쇄가 계속 연장되며 한없이 길어지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함께 웃고, 함께 한숨 쉬며, 어떻게든 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매일 아침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보며 서로를 위로했다. "이것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옥상에서 손을 맞잡고, 먼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며 희망을 품었다. “곧 괜찮아질 거야..." '자유'가 이렇게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다. 



항공사 스케줄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우리는 스페인 영사관에 연락을 취해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물었다. 영사관은 우리를 스페인 한인회 회장님과 연결해 주었고, 회장님은 현 상황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 유럽에서는 국적기만 운항 중인데, 좌석이 제한되어 있어서 한 명씩 띄어 앉아야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아 좌석 확보에 시간이 걸릴 거예요.” 회장님의 설명에 불안한 마음이 커졌지만, 동시에 작은 희망이 생겼다. “자리가 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의 약속에 기대를 걸며 우리는 연락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마침내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행 비행기 좌석이 생겼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제 귀국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비행기를 타려면 마스크가 필수였지만, 마스크를 구하는 건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였고, 비닐봉지로 장시간을 버틸 수도 없었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우산이었다. “물이 통하지 않으면서도 숨쉬기가 가능해 보이는데... 이거다!” 우산 천을 활용할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나는 즉시 우산 커버를 꺼내 들고, 그것을 재료 삼아 마스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천을 자르고 바느질하며 어설프게나마 두 개의 우산재질 마스크를 완성했다. 겉보기엔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마스크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남편과 나는 우산커버 마스크를 써보고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진짜 될까?" 하지만 웃음 속에는 묘한 진지함이 스며 있었다. 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비록 완벽하지 않은 마스크였지만, 우리에게는 작은 승리처럼 느껴졌다. 한때 비닐봉지로 머리를 감쌌던 우리의 생존 대책이 이제 우산마스크로 진화한 것이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마스크를 손에 든 채,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우스워 보여도, 이걸 쓰고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우리는 희망과 긴장감을 품고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떠날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6주 만에 바르셀로나를 떠날 수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도시는 마치 종말을 맞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텅 빈 거리와 닫힌 상점들, 고요 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 우리는 마치 좀비 도시를 빠져나가는 생존자 같은 기분으로 공항 셔틀버스 승강장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경찰들 몇 명 빼고는 아무도 없었고 버스 승객도 우리뿐이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했고 바르셀로나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는 독일 항공사였는데 탑승 순간부터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승무원들 중 누구 하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마스크를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더 놀라운 건 승무원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승객들조차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유럽에서는 여전히 마스크를 아픈 사람들만 써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심지어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뉴스를 봤음에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그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몇 시간은 긴장감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 한국행 국적기로 갈아타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우리는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모든 승무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얼굴에는 마스크와 보호 안경까지 착용한 모습이 마치 의료진의 비상 작업실을 방불케 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무방비 상태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모습에, 우리는 숨죽이고 그 장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내에 들어서자, 항공사 측에서는 그 귀하다는 마스크를 승객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이 마스크를 사용해 주세요.” 그들의 말에 우리는 손수 만든 우산 마스크를 조용히 가방에 넣었다. 이 작은 디테일에서조차 한국이 팬데믹에 얼마나 철저히 대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감염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를 단번에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며 승무원들의 방호복이 새하얀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며, 우리는 마음 깊이 안도와 감사함을 느꼈다. 이 나라가 보여준 철저한 준비와 신속한 대응 속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길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래도 이 비행기에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과 안도가 마음속을 채웠다.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는 곧장 출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절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치 추적용 모바일 앱을 등록하고, 체온을 측정하며, 여러 질문에 답하고 서명하는 새로운 과정들이 첨가되었다. 입국자 모두에게 2주간의 자가격리가 필수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빠르고 체계적인 진행에 안도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진행요원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말했다. “유럽에서 오신 분들은 자가격리가 아니라, 국가 지정 시설에서 격리를 하셔야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뭐, 자가격리랑 크게 다르겠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진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부부도 각자 1인실에서 격리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14일 동안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도착한 기쁨도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쩔 수 없이 격리 조치에 따라야 했고, 짐을 찾아 진행요원의 지시에 따라 지정된 버스를 타고 격리 시설로 이동했다. 시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첫 번째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 긴 면봉으로 코를 깊숙이 찌르는데,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눈물이 저절로 찔끔 났다. “이 검사, 14일 후에 한 번 더 진행됩니다.”라는 말에 우리는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러나 진짜 난관은 이제 시작이었다. 도착 후 곧바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는 잠깐 짐을 분리할 시간을 달라했지만 진행요원은 우리의 요청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지금 바로 방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나는 부랴부랴 남편에게 핸드폰 배터리 충전기 하나를 받아 들고, 그 길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묘한 고립감이 밀려왔다. 꼭 죄를 짓고 갇힌 사람처럼 느껴졌다. 철저한 방역 조치는 백번 이해했지만, 이미 감염자로 취급받는 듯한 기분에 울컥했다.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유럽 출신 남편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는 그를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남편은 내 예상과 달리 씩씩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가 안전하게 돌아왔잖아. 이게 최선이야.”라는 그의 말은 오히려 나를 위로해 줬다.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한 지 20시간, 우리는 피로가 온몸을 짓누르는 상태로 연수원 방에 도착했다. 그곳은 약 3평 남짓한 작은 공간으로, 꼭 필요한 가구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구석에 자리 잡은 오래된 작은 텔레비전은 마치 고물처럼 보였고, 겨우 5개 남짓한 채널만 볼 수 있었다. 이 방에서 유일한 창문은 겨우 5cm만 열릴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밖의 신선한 공기를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답답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졌다.


매일 아침 8시, 오후 12시, 저녁 6시, 모바일 앱에 체온과 건강 상태를 입력해야 했다. 시차 적응은커녕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 생활은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도시락은 정해진 시간에 문 앞에 놓였고, 그게 하루 중 유일하게 남편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문을 열고 도시락을 가져가려 할 때, 반대편 방에서 남편의 문도 열렸다. 남편은 내가 도시락을 가지러 방문을 여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짧은 순간 복도에서 서로를 보며 눈으로만 인사를 나눴다. 방호복을 입고 서 있는 진행요원의 감시 아래, 단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그 짧은 만남은 마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같았다—다만 발코니 대신 좁은 복도가 우리의 무대였다.


시설에서의 안내는 모두 한국어로만 제공되었다. 남편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 매번 답답해했고,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내용을 통역해줘야 했다. “점심은 지금 배달되니까 문 열어봐.” “체온 입력하는 시간이래.” 이런 단순한 대화마저도 우리에겐 하루를 지탱하는 작은 낙이 되었다.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갇힌 이 작은 방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소리였다. 하루하루가 기계처럼 흘러갔다. 시간의 흐름은 더디기만 했고, 벽은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다. 하지만 복도 너머 남편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루 세 번의 짧은 눈인사와 통화가 나를 버티게 했다. 피곤함 속에서도, 외로움 속에서도, 그와 함께 있다는 감각은 내가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었다. 


격리 생활 4일째, 매일 비슷한 도시락의 MSG 맛에 점점 지쳐갔다. 하루가 다르게 바깥공기가 간절해졌고, 창문을 활짝 열어 숨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첫 번째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음성! 더 기쁜 건, 비행기에서 함께했던 모든 승객들도 음성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이로 인해 다음 날부터 시설 격리에서 자가격리로 전환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기쁨의 만세를 외쳤다. “드디어 탈출이야!” 곧바로 이 희소식을 남편에게 전했고, 그의 목소리에서도 환호가 터져 나왔다. 만약 14일 동안 이 갑갑한 연수원 방에 갇혀 있었다면,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가격리로 전환된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집에서는 창문을 활짝 열 수 있고, 무엇보다 남편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렇게 5일 만에 연수원 방에서 탈출하게 된 우리는 감격 속에 다시 만났다.


퇴소 후, 우리는 즉시 포천에 있는 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손님들이 있는 펜션 건물에는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 집 2층에서 머물기로 했다. 큰 창문과 옥상이 있는 그곳은 그야말로 천국처럼 느껴졌다. 연수원에서의 갇힌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우리는 매일 창문을 활짝 열어 신선한 공기를 마셨고, 옥상에서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끔 군청에서 감시를 나왔지만, 우리는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며 우리의 위치를 알렸다. “저희 여기 있습니다!” 그들이 떠난 뒤에는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자가격리 해제 전 마지막 코로나 검사 결과도 음성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걸 깨닫게 해 주었다. 자유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맞는 단순한 행동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무사히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큰 행운으로 느껴졌다. 여행 중 뜻밖의 봉변을 겪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이 모든 것을 이겨냈고, 그로 인해 더 강해진 기분이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자"라는 마음을 품으며, 우리는 다시 삶의 소중함을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3월, 펜션도 잠시 주춤했다.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의 이동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우리 펜션에는 한 가지 큰 장점이 있었다. 일단 객실 자체가 많지 않은 소규모 펜션이었고 개별 마당, 바비큐장, 그리고 별도의 입구를 갖추고 있어, 다른 고객들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점! 이 덕분에 고객들은 비교적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었다. 우리는 방역과 청결에 전력을 다했다. 펜션을 이용하는 순간만큼은 고객들이 바이러스 걱정 없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모든 침구류와 소파 커버, 쿠션 커버를 사용 후 즉시 벗겨 고온에서 세탁하고 건조기로 살균했다. 수영장 물도 매번 교체하고 철저히 소독하여, 펜션에 바이러스가 얼씬도 못 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다. 손잡이 하나, 스위치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소독하며 방역에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을 고객들이 알아준 덕분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예약률은 눈에 띄게 상승했다. 4월, 5월, 그리고 6월, 예약은 점점 늘어났고, 펜션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철저한 방역과 청결 유지에 대한 고객들의 긍정적인 리뷰가 쌓이며, 펜션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믿음은 예약으로 이어졌고, 예약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초반 펜션 운영에서 모은 수익은 대출 상환 대신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데 투자했다. 미흡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메꾸고 마당에는 푸른 잔디를 새롭게 깔았다. 덕분에 펜션은 더 아름답고 쾌적한 공간으로 변신했고, 이는 고객들의 호평으로 이어졌다. "호텔보다 더 깨끗한 펜션!", "사진보다 실제가 더 예쁘네요!"라는 리뷰를 보니 우리의 노력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특히, 우리 펜션만의 독특한 유럽풍 인테리어는 차별성이 있었다. 당시 이런 스타일의 펜션은 흔하지 않았고, 젊은 층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또한, 펜션은 가족 단위로 이용하기에 최적화된 구조였고, 각 층을 독채로 사용할 수 있어 코로나19로 인한 제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안전하면서도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펜션"이라는 입소문은 우리의 또 다른 경쟁력이 되었다.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우리의 공간을 계속해서 발전시켰기에 이 모든 성과가 가능했던 것 같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우리는 이 어려운 시기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겨냈다. 철저한 준비와 차별화된 매력, 그리고 고객을 향한 진심. 그것이 바로 우리 펜션이 성공적인 상승 곡선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반면,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었고, 그 여파는 단체 펜션, 음식점, 카페와 같은 소상공인들에게 특히 치명적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업을 일구어 왔는지 알기에, 같은 소상공인으로서 그들의 어려움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아프게 했다. 문 닫힌 가게들과 적막한 거리를 보며, 단순히 안타까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작더라도 우리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리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사업을 이어가는 그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로 했다. 큰 마트 대신 동네의 소규모 식당, 카페, 상점들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가슴속으로 되뇌며, 가게에서 나올 때마다 작은 기쁨을 느꼈다. 또한, 화훼농가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꽃 구독 서비스도 신청했다. 매달 도착하는 아름다운 꽃들은 단순히 펜션을 장식하는 것을 넘어 더 큰 의미를 가졌다. 우리는 꽃을 SNS에 소개하며, 화훼농가를 돕기 위한 메시지를 함께 전했다. “이 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아름다운 꽃 사진과 함께 올린 메시지는 팔로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몇몇은 직접 꽃 구독 서비스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 작은 움직임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보람으로 다가왔다.


그뿐만 아니라, 소상공인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정성스럽게 온라인 리뷰를 남겼다. '가게 사장님들이 이 리뷰를 보고 조금이라도 힘을 내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소상공인 가게들을 추천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곳 정말 좋아, 한 번 가봐!”라는 한마디가 그들에게 또 다른 손님을 데려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는 누구에게나 무거운 짐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모두가 조금씩만 손을 내밀어 준다면, 이 고난도 함께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작은 행동들이 그들에게 힘이 되고,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렇게 함께 만든 작은 변화들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선 연대와 응원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희망을 전하려 애쓰는 동안, 되려 우리에게도 힘을 주었다. 어려운 시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지지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는 그때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이겨내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코로나19는 우리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학교는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었고, 음식점과 카페는 배달 중심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사람들 간의 소통은 점점 끊겼고,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 갇혀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웠던 건 아이들이었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뛰놀며 자랐던 시절과는 달리, 마스크를 쓰고 밖에 나가야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야 하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외출 제한으로 신체 활동과 친구들과의 교류가 사라진 그들에게, 이 어려운 시대는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졌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였지만,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한부모 가정이나 다문화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 끝에 펜션 객실을 무료로 제공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펜션의 한 객실은 아이들을 위해 놀이 시설을 넣어 꾸며두었고, 객실마다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었기에 하루라도 마음껏 뛰놀며 신나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길 바랐다. 


포천시청과 협력해 일을 진행했고, 지원을 시작하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가족들이 펜션을 찾아왔다. 그곳에서 보내는 하루는 그 가족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사했다. 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내가 더 즐겁고 뿌듯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펜션 곳곳에 울려 퍼졌고, 그 순간만큼은 이곳이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작은 행복이 피어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이분들에겐 정말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 준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펜션을 운영하길 잘했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이 경험은 내게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작은 희망과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내 삶의 커다란 보람이 되었다. 이후에도 나는 더 많은 나눔을 실천하기로 했다. 포천 아동복지시설에도 연락하여 객실을 무료로 지원하며 아이들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했다. 뿐만 아니라, 펜션 수익금의 일부를 매달 기부하며 작은 나눔을 지속해 갔다. 펜션을 통해 얻은 수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단순한 나눔을 넘어 내 삶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나누면 커진다”는 말을 몸소 느끼며, 지역사회와의 연대감이 더욱 깊어졌다. 펜션은 나에게 단순한 사업장이 아니라, 내가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겪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내 삶에 크나큰 기쁨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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