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의 위치를 검색하니 평소 이동동선에서 위쪽으로 20분 정도 벗어난 외진 곳에 있다.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 보니 숲에서나 들을 것 같은 맑은 공기 속 새소리가 들린다. 당근을 수확하는 모습도 보이고 가지런히 줄 서 있는 귀여운 무밭도 보인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늦춰진다. 투박한 제주의 돌담길은 빠른 걸음을 허하지 않는 마법이 숨어있는 것 같다. '굳이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나?' 싶어 몸과 마음의 리듬에 따라 느긋하게 걷는다.
푸르른 자연 속에 덩그러니 놓인 아담하지만 그림 같은 책방이 보인다. 나무에 걸린 풍경 소리조차 자연의 일부처럼 와닿는다. 문인 줄 알고 살며시 손을 뻗으니 유리 안쪽에서 책방주인이 손으로 입구 방향을 알려준다. 문이 아니고 창문이었던 거다. 아기자기한 벽을 따라 실내로 들어서니아늑함이 가득한 책방이다.
책들 사이를 거닐며 와닿는 제목이 있으면 프롤로그를 읽어 본다. 프롤로그도 마음에 와닿으면 차례를 살펴본다. 차례까지 와닿으면 좀 더 깊숙이 와닿은 소제목 부분을 펼쳐 읽어본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한 권의 책을 집어든다. 나에게는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제목, 간결한 차례와 애쓰지 않은 것 같은 글씨체와 글씨의 크기가 다른 느낌이다. 주인이 자리를 비워서 계산은 잠시 미루고 자리를 잡고 읽기 시작한다.
내 책이다 싶으니 다시 읽는 프롤로그가 더 깊이 와닿는다. 한 장을 넘기고 두 번째 장을 넘기는데 '왈칼!' 참을 시간도 없이 눈물이 뚝 떨어진다. 무슨 일인지 내가 더 놀라서 얼른 수건으로 눈물을 꾹꾹 닦고 책을 덮는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싶다.
책방주인이 들어오고 짐을 챙겨 계산대로 간다. 계산대 앞에 손바느질로 만든 책갈피가 있다. 아내분이 한 땀 한 땀 직접 만든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창문에 있는 조각보 커튼도 아내가 직접 만든 거라며 웃으며 넌지시 자랑을 꺼내놓는다. 아내를 향한 따뜻한 다정함이 묻어난다. 이 공간이 주는 자연스러운 포근함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책과 책갈피를 계산하고, 연필을 빌려 소담한 마당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있는 카페로 걸음을 옮긴다.
주문을 하고, 카운터에서 보이지 않으면서 구석지지만 아늑한 곳에 자리를 정하고 차분히 책장을 다시 펼쳐본다. 한 문장 읽으면 눈물이 뚝! 다음 장을 읽으면 어김없이 눈물이 뚝! 작가가 내 마음에 들어와 온전히 내 감정을 보듬어 주고 공감해 주는 위로의 포옹이다.
경쾌한 카페의 음악, 가벼운 바디감이지만 짙은 무게의 단맛을 전하는 아메리카노와 바느질로 책갈피를 만드셨다는 그분의 아들이 만든 투박한 식감의 당근케이크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는 틈이 된다.
페이지를 깊은 숨으로 넘긴다. 그렇게 몇 시간의 위안을 받은 후에야 '오늘은 충분했으니 덮어도 되겠다.'는 마음이 든다. 54페이지 여기까지다.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를 나오니 마침 책방주인이 지나간다. 책 잘 읽었냐는 밝은 물음에 연필을 건네며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데 순간 목소리가 떨려 끝맺음이 흐려진다. 미소로 대신 마무리를 하고 돌담길을 따라 되돌아 나온다.돌담길을 보며 걷다 보니 마법처럼 마음이 평온해진다.
주인이 없어진 빈 방을 치울 필요가 있을까? 방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치워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두어도 되지 않을까? 그 공간 그대로 두어도 좋고, 그 방의 주인 성격처럼 깔끔하게 정돈해 두어도 좋지 않을까?
방문을 꽉 잠그고 집주인조차 절대 열면 안 되는 비밀의 공간으로 둘 필요도 없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간직하고 싶은 자신만의 공간이 있는 것처럼 주인 없는 빈 방도 언제든 생각나면 들어가 잠시 머물러도 되는 집주인만의 다락방으로 둬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