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의 코앞에 꽃다발이 배달되었다. 2달 전 정기후원을 신청하고 처음으로 배달된 꽃다발이다. 함께 동봉된 화병에 꽃을 꽂고 여기저기 위치를 옮겨 알맞은 곳에 배치된 꽃의 자리는 역시 티테이블 위다. 매일 한두 번씩은 오랜 시간 차를 마시며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아침부터 환절기 알레르기에 두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재채기를 하며 훌쩍거리다 소파에 쓰러져 멍하니 있다보니 하늘이 지나치게 맑다. 가을 향기 가득 품은 바람까지 스쳐가니 꿈틀꿈틀 의지가 솟는다. 포트에 물부터 올리고 찻자리를 준비하는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렇게 의지로 꾸역꾸역 앉아 차를 몇 잔 비워내니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돌면서 재채기도 콧물도 자취를 감춘다. 드디어 평온해진 몸을 느끼니 어제 꽂아 둔 꽃이 눈에 들어온다. 대학 친구들과의 인연을 끝내고 맞이한 꽃다발이다.
20살부터 온전한 나의 20대와 30대를 함께 보내고 40대를 맞이한 친구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각자의 상황에서 변하기도 하고 다시 그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하며, 완전히 다른 어른의 모습으로 달라지기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도 이해타산을 따질 필요도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도 없는 그냥 친구들이라 좋았다.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가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2달 전쯤 한 친구의 의견이 시발점이 되어 세월이 무색하게 단톡방에서 모임을 없애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터라 전원 찬성의 깔끔한 마무리가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문자로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1년에 1~2회 모임을 위해 매달 3만 원씩 자동이체 되던 회비가 1/n 정산되어 입금되었고, 자동이체를 해지하면 흔적 없이 생활비에 스며들어 없어져 버릴 회비가 미련의 탈에 씌어 둥둥 떠다녔다. 그러던 중 초록이들만 있는 공간에 꽃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화훼 농가 돕기 캠페인으로 한 달에 한 번 꽃다발 정기배송을 신청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검색에는 소질이 없는 덕에 화훼 농가는 못 찾고, 정기후원과 함께 꽃배달을 해주는 단체를 발견했고 후원금 3만 원이 눈에 꽂혔다. 3만 원과 꽃배달의 절묘한 조합이 나를 위한 완벽한 타이밍이다 싶어 바로 신청을 마쳤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전해진 꽃의 잔상이 아련하다. 그들과 함께 한 추억과 세월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그 추억과 세월 속의 순수하고 생기 넘쳤던 나의 젊음이 아쉬워서 놓지 못하고 있던 미련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의 변해가는 얼굴을 보며 나의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느꼈고, 문득문득 마주하는 그들의 대학시절 모습이 스치는 찰나에 나의 대학시절 모습도 스쳤기에 꽉 쥐고 있었구나!
매달 배달되는 꽃다발을 받을 때마다, 꽃이 아름답게 펴있는 일주일 동안은 그 시절과 그 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이 왜곡되고 미화되어 아름다움으로 떠오를 예정이다.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