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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진다는 건

엄청 소중한 것조차 잊어간다는 건 자연스럽지만 아프다.

by 하루사리

건조기에서 수건을 꺼내다가 창밖 해 질 녘의 구름 가득한 먼 산을 보는데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어제 저녁, 치약을 버리려고 다용도실 문을 여는데 세탁기가 있다. 누군가 치약을 버리기 전에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세탁기 청소가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자른 치약을 세탁기에 넣고 헹굼 코스를 선택하고 시작 버튼을 누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세탁기의 호출을 받고 세탁기 문을 여는데 안 열린다. 세탁기 안 흥건한 물 때문인지 세탁기 문이 잠겼다. 괜한 짓을 또 했다. 물을 어떻게 빼야 하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있다가 다용도실 문을 닫고 나온다. 모르겠다.


오늘 저녁, 다용도실 문을 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하게 세탁기 문을 연다. 문이 아무렇지 않게 열린다. 그런데 아직 세탁기 안에 물이 흥건하다. 그릇을 가져와서 퍼낼까 하다가 창가 쪽에 설치해 둔 미니건조대 위 수건이 눈에 들어온다. 수건과 함께 이것저것 세탁물을 몇 개 찾아서 세탁기를 돌린다.


요지경으로 세탁기가 작동되고 다시 세탁기의 호출을 받고 세탁기 문을 여니 언제 그랬냐는 듯 세탁물이 잘 탈수되어 있고 세탁기 안도 물기 없이 멀쩡하다. 세탁물을 건조기에 옮겨 넣고 작동시킨 후 다용도실 문을 닫는다.


건조기의 호출을 다시 받고 종종걸음으로 다용도실 문을 열고, 건조기 문을 열고 뽀송한 세탁물을 기분 좋게 꺼내어 돌아서는데 창밖 해 질 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이 있었다. 늘 있었고 늘 봤었는데 이 찰나에 보인다.


아! '쿵' 익숙해진다는 건 이런 거구나!


늘 익숙함이란 단어는 편안함과 안전함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의미로 다가왔는데 이 순간 가슴에 쿵하니 와닿는 느낌은 슬픔이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를 오고 좁은 공간이지만 어느 곳에서나 아름다운 뷰가 보이는 창밖 풍경이 너무 좋았다. 한낮의 햇살에는 거실과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고, 해 질 녘이 되면 설거지를 하며 일몰의 아름다움에 빠지기도 또 때로는 옷방으로 사용하는 작은방에 쭈그려 앉아 노을을 보며 차를 마시기도 했다. 굳이 다용도실까지 가서 조금씩 다른 일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랬다.

잊고 있었다. 해 질 녘 햇살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쳐놓은 작은방 창밖 풍경을. 싱크대에서는 설거지만 하고 다용도실에서는 세탁과 분리수거만 하느라 매 순간 설레게 소중했던 풍경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익숙해지는 건 이런 거구나! 시간이 약이라던 그 말들의 의미는 이런 거였구나!




익숙함에 놓아버린 그 순간들과 익숙함 뒤에 숨어버린 시린 무언가가 찾고 싶기도 잃고 싶기도 한 하루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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