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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아닌 감사함

여름의 초입, 봄을 만났다.

by 하루사리

뒤숭숭한 소식에 귀도 눈도 마음도 무언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라떼는 그랬는데'라는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지도 않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막연한 걱정에 불안해하지도 않는 일상이다.


눈을 뜨고 바삐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주말 아침임에 안도하며 꽃잠이랑 뒹굴뒹굴 자극 없이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속에 마음껏 허우적거리다가 흐느적흐느적 일어난다. 습관적으로 트는 음악도 뭔가 무겁게 input으로 느껴진다.


이유 없이 커버도 씌우지 않고 치우지도 않은 채 가을, 겨울, 봄을 지나 다시 여름의 초입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선풍기를 씻고 싶다. 나사를 풀고 헤드를 분리해서 흐르는 물에 꼼꼼히 씻어본다. 그냥 흐르는 맑은 물에 닿는 맨손의 느낌이 좋아서 손으로만 뽀득뽀득 씻고 베란다 창가에 기울여 두고 거실로 나온다.


뭘 할까? 미세먼지 없음을 확인하고 집안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창틀에 쌓인 먼지도 돌아다니며 닦아내고 나니 집안 전체의 공기도 한층 청량해진 기분이다. 청소기도 돌리고, 밀대로 한 번 더 구석구석 밀며 집안을 돌아다닌 후 다시 뭐 하지 싶다.


한동안 거실 구석으로 밀어뒀던 좌식 티테이블을 거실 가운데로 옮기고, 테이블 위 다보를 걷어내고 이것저것 준비를 한 후 자리를 잡는다. 뭔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비워내고 싶은 어수선함에 뜬금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찾은 안정을 안고 물을 끓인다.


열린 거실창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뜨거운 차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데 무언가가 말끔해진다. 따스한 햇살 아래 미풍에 자유로이 나부끼는 창밖 초록의 싱그러움을 그저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의 순간에 내가 있음에 뜻 모를 감정이 몰려온다.


경쾌한 뉴에이지 음악을 틀어도 될 것 같다. 한 잔 한 잔 비워가는 만큼 무언가도 비워지며 낯섦이 채워진다. 처음으로 훅 들어온 감사함이다. input이 있을 때만 습관처럼 내뱉었던 output의 '감사합니다'가 아닌 그 무엇의 익숙한 듯 낯선 감사함이다.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뭘 감사해야 하는 건지'라며 좋은 말과 경험에 대한 뭇사람들의 그 마음이 때때론 가식처럼 느껴져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지금에서야 느껴진다. 일상의 감사함이 이 순간에 내려앉는다. 이런 거구나! 삶의 감사함이란.




무엇의 마음이 감사함이란 걸 알게 된 Fe 하루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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