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원회귀 Jun 28. 2021

20년째 이런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집안일을 못해도 깨끗한 집에서 살고 있다. 




한 사람어지르지 않으면 깨끗할 수 있으니 최대한 내 집에서 사뿐히 조용히 산다. 이렇게 존재감 없이 살아도 먼지가 쌓이고 얼룩이 생겨있다. 진짜 희한하다.


마음먹고 바닥 걸레질을 한다. 걸레질을 끝내고 내심 뿌듯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난다. 얼마나 구석구석 열심히 청소를 했는지 인증하는 발도장으로 가득하다. 걸레질하기 전 슬리퍼 바닥을 확인했어야 했다. 안 하니만 못한 바닥을 보며 다시는 걸레질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결코 배신하지 않는 부직포 걸레를 심심할 때마다 밀고 다닌다. 존재감 있는 얼룩은 물티슈로 쓱쓱 참 깔끔하다. 청소하기 싫은 날은 안경을 벗고 깨끗한 집에서 보낸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것이 분명하다. 대학 때부터 20년째 세탁기가 한 내 빨래는 일관성 있게 전후가 똑같고 심지어 안 하니만 못한 모습으로 건조되어 있다. 단지 빨래를 했으니 빨래한 옷이 되어있는 것이다. 학생 때 공동 세탁실을 사용했다. 같은 세제 같은 세탁기로 빨래를 했는데 내 옷만 변함없이 그대로다. 주인처럼 고집스레 일관성 있다. 방학 때면 택배로 옷을 한가득 본가로 보내기도 했다. 본가에 있는 세탁기는 달랐기에. 


얼마 지인으로부터 나만 몰랐던 신세계를 알게 되었다. 빨래를 넣고 하얀 마법의 가루를 뿌린 후 뜨거운 물만 부으면 보글보글 부글부글 마법이 일어난다. 차 한 잔 하고 오니 뽀얘진 빨래가 있다. 세탁기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끝. '과탄산소다' 이름만큼 과한 탄성을 지르게 한다. 진정 내가 한 것이다. 집들이 때 받은 모셔져 있는 새하얀 수건들을 몇 년 만에 꺼낼 때가 된 것이다. 드디어 하얀 것들을 살 자격도 생겼다.


마법의 가루를 아낌없이 한 가득 넣고 기분 좋게 이것저것 빨랫감을 넣는다. 여기까지 했어야 했다. 진심으로 딱 여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문득 눈에 은 남색보인다. 한 번도 물 빠짐이 없었던 옷이기에 맑은 남색을 꿈꾸며 당당하게 푹 담근다. 잠시 후 발견한 빨래들은 희미한 남색의 흔적들이 스며들어 정체성을 잃고 어이없어하고 있다. 빨래를 건지며 도대체 내가 왜 이러나 싶다. 알고 있다. 밝은 색 빨랫감과 짙은색 빨랫감을 따로 분류해서 빨아야 한다는 것쯤은 예전부터 쭉 알고 있었다. 단지 마음이 순간 통해서 남색 옷을 넣었을 뿐이다. 이쯤 되면 빨래를 못하고 싶어서 안달 난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스럽다.


큰 교훈을 얻은 후 아직 사용 전인 새하얀 수건들은 얌전히 있던 그곳으로 들어간다. 마법의 가루는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흰색 계열의 면 빨랫감에만 뿌리기로 결심한다. 빨래를 한다. 단단히 마음먹고 색깔별로 분류해서 세탁망에 정성스레 넣는다. 밝은 색 옷이 든 세탁망부터 차례대로 세탁기에 넣고 버젓이 한 번에 같이 돌린다. 


깨끗한 집에서 살게는 되었는데 빨래는 그냥 못하고자 한다.




이유만 아는 하루살이는 이유를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