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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Jun 25. 2021

틸란이

아주 공명정대한 주인 덕이다.

초록초록한 식구들과 함께 산다. 집에 생명력이 있어야 에너지가 생기는 거라며 주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둘씩 데려다 놓은 초록이들.




앙증맞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하직하는 것을 목격하고 웬만하면 잘  자라는 녀석들로 꽃집 주인의 추천까지 받아 데리고 와서 그런지 굳세게 잘 자란다. 자꾸 보면 정든다고 자연스레 초록이들이 있는 곳부터 눈길이 가는 주인으로 길들여 놓은 대단한 녀석들이다.


가는 카페마다 본다. 꽃집마다 있다. TV만 틀어도 등장한다. 나만 없다. 나만 없을 수 없다며 처음으로 사달라고 부탁드려 모셔온 녀석이 등장했다. 풍성한 머릿결을 휘날리며 나타난 이 녀석은 직사광선이 없는 밝은 곳을 좋아한다 해서 침실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틸란드시아 일명 틸란이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아침 눈은 뜨면 틸란이가 보인다. 바람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미세먼지가 집안에 들어오든지 말든지 그 따위와 상관없이 창문을 연다. 풍성한 머릿결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도록 섬세하게 손을 넣어 흔들어준다. 머릿결 한 올 한 올 사이로 바람이 부드럽게 스쳐갈 수 있도록 한 껏 볼륨을 넣어 준 후 방을 나온다. 모닝 인사를 하는 초록이들을 순발력 있게 휙휙 둘러보고 출근 준비를 한다. 틸란이, 초록이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딱 한 번씩만 살펴봐준다.


틸란이는 주 1회만 물을 좋아한다. 토요일 아침이면 대야에 한 가득 물을 담아 2시간 푹 샤워를 시켜준다. 힘 없이 얇아지고 보들보들했던 녀석은 생기를 되찾고 푸릇푸릇한 싱그러움 한가득 안고 물에서 나온다. 빨래 건조대에 매달려 똑 똑 여운을 즐긴다. 젖은 머릿결로 좋아하는 바람도 신선하게 마실 수 있게 창문을 열고 엉킨 릿결을 조심스럽게 풀어준다. 다시 자기 자리에 걸어준다. 다시 한번 더 풍성하게 볼륨을 넣어주고 사랑 한가득 눈빛을 안겨주고 방을 나온다. 빈 페트병에 물을 채워 적당히 나눠가며 초록이들에게 물을 준다. 3~4일에 한 번씩 물은 마셔야 하는 녀석도 있었던 것 같은데 차별하면 안 되니 아주 공정하게 일주일에 딱 1번만 물을 주기로 했다틸란이, 초록이들 모두에게 더없이 공정한 주인이다.


초록이 가득한 거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또 다른 초록이 가득한 서재에서 매일 차를 마신다. 주말이면 서재 죽순이가 되어 뒹굴뒹굴한다. 참 많은 시간을 의식도 없이 초록이들과 함께 한다. 아침 눈 뜰 때와 잠잘 때만 틸란이를 잠시 본다. 암막커튼을 쳐버리면 틸란이만 밖에서 밤을 보낸다. 모든 초록이는 밤에도 실내에서 주인과 같은 공기를 느끼는데, 틸란이만 창가와 베란다 사이에서 야외취침을 한다. 칼같이 공평하여 공정을 부르짓는 주인이라 틸란이만 차별하는 것 같아서 내심 미안하다.


생명력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초록이들은 이상하리만치 잘  자라고 있다. 늘 주인만 모르게 새싹들이 돋아나고 항상 잎들이 무성하다. 주인보다 키가 더 큰 거 아닌가 싶은 정도로 잘 자라는 틸란이는 더없이 건강하다. 결론은 알아서 잘 자라는 모두 행복한 우리 집이다.




차별은 딱 질색인 하루살이는 꿋꿋하게 공명정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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