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 30분쯤, 포트에 물을 올린다. 물이 다 끓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기에 분주함 가득 여유롭게 일레븐시즈를 맞이한다.
6~7년 전쯤 우연한 기회에 목공작품으로 티트레이를 만들었다. 감격스러움으로 생활 속에서 사용해보려 하였으나 바닥에 틈이 있어 물이나 차가 쏟아지면 대책이 없다 보니 어느 날부터 구석으로 밀려나 존재감이 없던 녀석이다. 몇 달 전 소창 행주를 선물 받았다. 딱 좋아하는 천의 느낌이라 행주로 쓰기에는 아쉽다 생각하던 중 우연히 트레이를 꺼내 덮었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행주는 멋진 다보가 되어 트레이와 함께 티타임에 빠지지 않는 소품이 되었다.
새 인생을 시작한 티트레이를 꺼내고 다보를 덮는다. 같은 디자인 같은 다보지만 모서리에 있는 자수의 색이 다르기에 오늘의 기분에 따라 신중히 선택한 것이다. 티트레이의 상단 왼쪽부터 모래시계, 워터저그, 스트레이너, 티팟을 놓는다. 여기까지는 고민이 필요 없는 과정이다.
오늘은 왠지 수채화 같은 맑은 느낌으로 싱블리 다즐링에 마음이 간다. 저울을 꺼내어 무게를 맞추고 티팟에 담는다. 홍차가 선택되었으니 찻잔을 선택하는 것은 느낌에 맡겨본다. 그리고 달다구리를 놓으면 준비 끝.
이미 한 김이 빠진 끓은 물을 멋지게 높이 들어서 티팟에 따르고 남은 물은 워터저그에 담는다. 모래시계를 돌리고 티룸이 된 지 오래인 서재로 자리를 옮긴다.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를 켜고 앉으면 나만의 일레븐시즈가 시작된다. 점핑하느라 한창 재미있게 움직이는 찻잎을 보며 잠시 넋을 놓아본다.
실내 온도 31.5도, 창 밖에서 뜨뜨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요란한 매미 소리에 시골 평상에 앉아있는 것처럼 뜨거운 바람은 시원한 바람인양 살갑다. 선풍기는 필수다. 일 할 때는 땀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않겠노라며 에어컨에 붙어살았건만 재충전 중인 이 시간만큼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싫다. '나 돌아가고 있어요'라고 알려주는 적당한 소리를 내며 미풍으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은 회전 모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달콤하게 스쳐가는 바람결이 순간 순간 간절하기에 정답다. 빼놓을 수 없는 음악 선곡, 가사 없는 피아노 선율이 딱이다.
어느새 땀방울이 살며시 흐른다. 그리고 뜨거운 홍차를 한 모금 마신다. 혼자 있기에 가능한 더없이 편하고 가벼운 홈웨어를 입은 나는 세상 편안한 자세로 완벽한 휴식을 누린다. 적당한 더위 속 살짝쿵 찾아온 오전의 나른함은 스치듯 달콤한 선풍기 바람과 뜨거운 차 한 잔 후의 땀방울의 시원함에 상쾌함으로 바뀐다.
일주일째 반복되고 있는 나만의 휴가는 24시간 중 딱 이만큼만 매일 행복해도 인생이 행복할 것 같다 느끼며 완벽한 멍 타임으로 일레븐시즈를 채우며 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