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 일기예보에서는 비 예고가 없었는데, 눈을 뜨니 온 세상이 뿌옇게 비가 오고 있다. 내가 게으른 것이 아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아침 운동은 생략할 수 밖에 없는 날인 거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방법이 수두룩하겠으나 할 의지가 없을 땐 할 수 없는 이유는 딱 1가지면 충분하다.
코로나백신 부작용이 무서워 시작한 운동이다. 불확실한 부작용보다는 몇 년이고 마스크와 한 몸이 되어 살 의지가 더 강한 사람이지만 직업상 선택의 여지없이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다행히 1차는 특별한 부작용 없이 잘 지나갔지만 2차가 더 걱정이기에 더 열심히 세상 무거운 발걸음으로 매일 아침 1시간씩 걷기 운동을 한다. 접종이 2주 연기되면서 연기된 만큼 쉬었다 운동을 할까 하는 합리화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한 주의 시작에 아주 반가운 비다. 일기예보를 보니 일주일 내내 비 예고가 있다. 하늘이 준 쉼이구나 싶어 만족스럽다.
선물같은 아침의 보너스 여유를 어떻게 누릴까하며 방황하던 내 눈에 빨래통 속 빨랫감이 보인다. 몇 개 되지 않아 애매한 빨랫감 이건만 굳이 빨래가 하고 싶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세탁물이 세탁기 속에 들어간다. 오늘의 기분에 따라 세제를 적당히 넣고 세탁 시간을 고민한다. 오늘은 빠른세탁 코스로 30분 당첨이다. 세탁물의 상태, 종류, 양 등의 합리적인 세탁의 세계는 남의 세상일 뿐.
할 일을 시작한 세탁기 앞에 웅크리고 앉는다. 적당한 소음을 내며 아주 열심히다. 세탁물을 다루는 세탁기의 기술이 과격하기까지 한 것을 보며 새삼 그 역동적 에너지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는다. 살살 달래듯이 세탁물을 요리조리 흔들흔들 풀었다 다시 인정사정없이 퍽퍽 패대기치는 기술에 감탄이 절로 난다. 속이 후련하다. 하얀 거품이 점점 줄더니 어느 순간 원심력에 의해 빨랫감들은 통에 붙어버리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내부만 보인다. 블랙홀처럼 정신도 점점 빨려 들어간다. 순간 '띠 리리리~ ' 할 일을 마친 세탁기가 의기양양 마침표를 알린다. 30분 참 짧다.
건조기도 없으면서 굳이 비 오는 날 빨래를 한 당당함으로 베란다에 탁탁 리듬감 있게 털어서 넌다. 볕 좋은 날보다 더 신나하는 손목 스냅이다. 촉촉함 가득한 빨래를 보며 진짜 일주일 내내 비가 오면 마르긴 할까 생각해본다. 언젠가는 마르겠지 하며 화창한 날 빨래를 다시 하지 뭐 싶다.
뭐 있나? 타인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것도 아닌데,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냥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