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Dec 01. 2023

마음이 어려워지면 또 오세요

'니 멋대로 입어라' 사장님과의 조우



© iamjiroe, 출처 Unsplash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여긴 인사해 주는 사람도 없네.

뭐야, 색깔 별로 옷 진열해 놓은 거 무지개야 뭐야.      


앞에 들어갔던 가게는 좁긴 했지만 딱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들이 아주 조그맣게 걸려 있었다. 

손으로 만지면 안 사고는 큰일 날 것 같은 무거움도 풍기면서.


그래도 그 가게. 

첫인사는 상냥했는데. 스키니를 찾으니까 위아래로 훑을 때부터 기분 나빴다.

요즘 그런 옷 안 찾는다 딱 자르는데서 완전 별로였지.     


주눅 들었다. 


내가 패션센스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보는 시선은 내가 잘못한 것 만 같은 기분 나쁜 묘함이 있었다.  


 


© gingermias, 출처 Unsplash





   

그런데 여긴 인사도 없다. 


저기 머리 희끗희끗한 단발머리 어르신이 주인은 아니겠지.

내가 마흔을 넘었긴 한데 마음은 청춘이란 말이지. 

20, 30대 여성 쇼핑몰을 굳이 검색해서 옷을 사 입었다 이거지. 

여기는 종류는 많은데, 뭔가 촌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사장님은 어디 가셨나?  

   

“저기, 뭐 찾는 거 있어요?”   


  

머리가 희끗해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인 줄 알았는데. 완전 영하게 입으셨네. 갈색 뷔스티에 원피스 밑에 청바지를 받쳐 입었어.

빨간 뿔테 안경이 흰머리랑 매치가 저렇게 잘 되나?

분홍 립스틱도 잘 어울리시네. 


이 할머니가 설마 주인?     



“저 주인 맞아요. 젊은 사람들은 제 흰머리만 보고 들어왔다가 바로 나가 버리는 경우도 있던데. 

이래 봬도 한 번 왔다 하면 단골각이지.  

   

뭐래. 단골각 이래. 이 어르신 쌔삥이라는 말도 알겠다. 진짜.     


”아... 제가 실은 스키니 진을 찾는데요. (아시려나) 요즘 잘 없죠? 

제가 하체가 저주받은 데다 짧고 뭉툭한데요. 

요즘 유행하는 통 넓은 바지는 입어보니깐 못 봐주겠더라고요.

제 다리 커버할 수 있는 바지가 없을까 해서요.

전 아무래도 딱 달라붙는 바지가 더 날씬하게 보이는 거 같던데......"     


이 분이 잘빠진 핏을 아시려나. 쩝.     


”어머, 근데 자기 몸매 말하면서 너무 낮춘다. 저주받은 하체라니. 내 눈엔 볼륨 있고 잘빠지기만 했구먼.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화끈하게 들이대야 할 때가 있어. “     


”저... 너무 튀는 거... 싫어해요. “     


”자기야, 지금 부츠 컷이랑 와이드 핏 유행하는 거 나 알거든. 그 사이에서 스키니 진 입으려는 자체가 튀는 거 아냐? “    

 

”아...  그건 그렇네요. “     


”그러지 말고 자기야 이 호피 무늬 바지 한번 입어 봐. 자기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한 사람들은 한 번씩 화끈해질 필요가 있어. “     


”어머, 저 이런 거 못 입어요. “     


”내 친구는 몸매가 푸짐하고 풍성한데 바지를 얼마나 타이트하게 입는지 몰라. 

거기다 빨간 구두가 지 시그니천데. 나 그 애 옷 입는 거 보면 완전 숨통이 다 뚫린다니깐. 

지 하고 싶은 거 다 입어. 얼마나 시원해. 누가 뭐라 해도 제멋대로거든. 


그 애는 지 몸을 안 봐. 그냥 입었을 때 자기 마음이 얼마나 부풀어 오르는지만 생각해. 

진짜 화려하게 해 가지고 다니는데 주눅 드는 경우가 없어요. 

화려한 거 입으면 마음도 그렇게 되나벼.

그러니까 안 사도 좋으니까 한번만 입어 봐. “     


어유, 진짜. 나 튀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이 어르신의 말을 물릴 수가 없다.      







   


”어머  뒤태 봐라 뒤태. “

이렇게 이쁜 태를 감춘다고. 말도 안 돼 진짜. “  

   

그래 내가 엉덩이 라인은 괜찮았지. 근데 너무 화려한데. 

이 동물무늬 칠갑인 바지를 입고 밖에 나간다고. 

아 절대 못해. 못해!!!!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어때. 입어 봐. “     


”저기,,, 저 이거는... 도저히 못 입겠어요. “     


”왜? 마음이 부풀어 오르지 않아? “


”아... 뭔가 세지는 건 같은데 이 무늬가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제가... 한 번 골라볼게요. “     




”어머, 자기야. 내가 원하던 바야. 이제 원하는 거 말하기 시작했네. 

내가 좋다고 자기한테 다 좋을까? 나는 그냥 자기 마음에 불을 지펴 준거야.      

진짜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이 어떤 건지 스스로 생각해봤으면 했어. “     


”아,,, 그러신 거예요? 저는 또 입었으니깐 사야만 할 것 같아서... “  

   

”에이 입어봐야 나한테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알지. 자기야 거침없이 입어. 

자기 집에 있는 옷하고 잘 맞는지 고민도 좀 해보고. 

이왕이면 계속 입을 옷을 사야지. 

근데 너무 무난한 것만 찾지 말고.    

  

진짜 입고 싶은 바지가 뭔지 거기에만 집중해. “     


가만 보자. 나 어떤 옷을 입고 싶었더라?     



그래 집에 천지로 있는 게 스키니 진에 검은 바지였다. 

통 넓은 바지는 왠지 거북하고. 호피무늬는 좀 부담되지만 체크무늬 바지는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을까. 

미선 언니 가죽 바지 입었을 때 끝내주던데. 나는 왜 밋밋한 무늬에 똑같은 스타일, 무채색 옷들만 입으려고 했을까. 



내가 진짜 입고 싶은 옷은 뭘까. 나는 이 옷을 입고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걸까.  

        


결국 여러 벌 입어 본 끝에 진한 감색에 체크가 섞여 있는 일자 핏의 바지를 샀다. 

무채색과 스키니진만 가득한 옷장에 새로운 변화다. 

집에 있는 남색 재킷이랑 같이 입으면 나쁘지 않겠지. 

사장님들이 권해주는 것만 사 입었는데.

 내 눈으로 핏을 보고 내 손으로 옷 고르는 과정들은 생각보다 즐거움을 주었다. 

큰 틀을 벗어난 건 아니지만 약간 새로운 걸 시도했다는 자체가 뿌듯하다는 걸 느낀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권하는 건 거의 해 버리는 편이었다. 그게 마음 편했다. 

권하는 걸 뿌리쳤다가 기분 나쁘게 말하면 대구도 못 했다. 속으로 욕하며 뒤돌아서는 입맛이 썼다.

그런 시간들이 자잘하게나마 반복되는 편이었는데. 

옷 살 때도 그렇다는 걸 알아차리니 좀 놀라웠다.      


여기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니깐 왠지 다른 일들도 조금 더 색다르게 해 볼 수 있겠는데 하는 

조그마한 용기가 나도 모르게 샘솟는다.

애기 낳고 이 세상 버거운 일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날처럼 솟구치는 자신감은 또 참말 오랜만이다.     


여러 감정을 해맑게 느끼며 옷 가게를 나섰다.      


‘네 멋대로 입으세요’


이 가게에는 어떤 힘이 있는 걸까.    


      

”자기야, 마음이 어려워지면 또 와.

옷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어. “     



사장님의 마지막 한마디가 귓전에 울린다. 

눈물이 핑 돌아 서둘러 길을 나선다.      


사장님 마음 아릴 때 또 올게요.





© mikepetrucci, 출처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짧은 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