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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6. 2023

수필로 피어나는 일상


 만약 이번에도 선택받지 못하면 내가 생각한 것들을 하나 둘 풀어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내게 있는 것, 없는 것들을 다 끌어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썼다. 분명 오후 2시면 발표가 난다 했는데. 휴대폰에서는 메시지 알람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다. 가만 보니 발표 날짜가 하루나 지나 있었다. 나는 완벽히 떨어진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마음먹은 대로 해보자며. 일주일에 두 번 듣는 줌바를 재등록하고, 자격증 시험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언젠가부터 방문자 수가 뚝뚝 끊겨서 글 짓는 일을 포기해야 하나 할 정도로 근심이 잦았던 날.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필 반에 등록했더니 그 날짜도 다가오고 있었다. 제법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서는 수필 강좌가 진행된다 했다. 아침이 제일 바쁠 시간인데. 애들 학교 보내는 일은 어쩌지?


 안될 것 같은 일도 어찌 잘 구워삶아보면 길은 열리게 되어있다. 도서관까지 가는 가장 빠른 노선의 버스를 검색했다. 그래 거기서 내려 다시 환승하면 제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가방 속엔 버스 안에서 요깃거리처럼 읽을 책을 배부르게 집어넣고 강의를 들으며 메모할 수첩과 펜도 야무지게 챙겼다. 설레는 마음과 기대되는 마음이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는 사이. 도서관 수필 교실에 도착했다.

 쑥스러운 자기소개도 수첩에 미리 적어보고. 수업 중 일상의 것들을 수필에 포개어 보라는 선생님의 설명이 가장 듣고 보기 좋았다. 맨 끝에 앉아서 눈이 초롱초롱한 학생이 되어 나이도 잊은 채 수업에 열중했다. 그러나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보통의 것들에서 의미를 추출해 글로 뽑아내라는 그 말은 얼마나 어렵게 들리던지. 그 시간부터 길을 걸을 때면 아장거리는 아가가 된 마냥 허투루 지나치는 것들이 없었다. 갈라진 길의 틈 사위를 마른 눈으로 골똘히 지켜보았다. 벽에 대해 생각해 보라기에 벽지를 얼마나 눈이 빠질 정도로 쳐다보았는지. 벽에 대해서 대체 뭘 써야 하느냐고. 길 위의 금 사이로 의미를 뽑아낼 것이 당최 뭐가 있으려나?


 어려운 생각들은 잠시 내려놓은 주말. 복잡한 도로 위를 지나 꽃이 만발한 식물원을 찾아갔다. 애들은 고맙게도 태권도장 행사가 있어 저희들끼리의 시간을 보냈다. 함께 무얼 할까 고민도 하기 전에 남편은 거기 안에 있는 카페에 앉아 게임 방송을 넉넉히 보겠다고 내게 말했다. 그럼 나는 물리도록 책을 읽겠다고 맞섰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 앉아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시간을 보냈다. 책을 지겹게 읽으려 했지만 온몸이 쑤셨다. 식물원 산책이나 가볼까 하고 가볍게 길을 나섰다. 스치듯 꽃길을 걷다가 일상을 비틀어 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너희들을 꼬아서 내가 보랴. 가만있자. 꽃 잎사귀는 어찌 생겼더라. 가까이서 바라볼까. 너는 무슨 색을 가졌니? 어떤 향기를 머금었니. 산책 나와 신이 난 강아지처럼 킁킁대며 그곳을 쏘다녔다. 그러다 가만히 자리에 머물러 곁에 있는 꽃들의 얼굴을 하나 둘 바라봤다. 손톱보다 쪼그만 얼굴을 가진 걔네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니 또 다른 얼굴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자연의 색감들은 어찌나 다채롭던지. 하나같이 똑같이 생긴 얼굴이 없었다. 이름은 잘 외워지지 않지만 꽃들을 즐기기엔 그것쯤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늘보다 더 맑은 빛의 꽃 잎사귀. 노랑을 온몸으로 머금은 꽃잎은 연둣빛 잎사귀와 어우러지니 더욱 새초롬 하더라. 수줍은듯한 분홍 꽃잎들이 나를 바라보니 내 얼굴이 더 발그레 지는 것만 같다. 벚꽃 잎이 돌길에 내려앉은 모습들은 꼭 붓으로 꽃잎을 콕콕 찍어 놓은 듯했다. 눈으로 훑어 내리던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저 스쳐 지나쳐버린 날들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남편과 거의 대화도 하지 않은 채 그 시간을 누렸는데 어찌 마음도 풍성해졌다. 서로가 즐기는 것을 각자 나누는 시간들 속에 많은 이야기는 필요치도 않았다. 함께 있다는 것에 든든했고, 서로의 것을 나무라지 않는 마음들이 넉넉했다. 그 속에서 새처럼 포로롱 여기저기 드나들며 나만의 시간을 고요히 보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평일의 날들로 돌아와 일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내 곁에서 글 쓸 거리를 건지기 위해 요즘 보통 부지런한 것이 아니다. 반찬 한 가지를 만드는 일에도 예전보다 품을 더한다. 어쩔 수 없이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해, 그걸 글로 지어 나르기 위해 성의를 다하는 것이다. 손에서 놓았던 빵을 다시 만들기 시작하고, 밥알을 꼭꼭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싹둑 베였다 새살이 움트는 내 상처까지도 매만지며 들여다보는 중이다. 화분을 눈앞에 두고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줄 알았던 여린 잎사귀의 감촉들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시시한 것이 없다. 고 작은 것 들안에 보물 같은 이야깃거리들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아 나는 일상이 조금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잘 써놓은 수필을 보면 기가 콱 죽어버리지마는 어쩌면 수필은 나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라기에 조금은 더 자신감을 가지려 한다. 내가 나고 지낸 일들을 글로 적어내리는 것을 나보다 잘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실력은 뒤처질지 모르겠지만 내가 일상을 나답게 잘 살아낸다면 나다운 글만큼은 잘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내 일상이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것은 나중의 문제다. 내가 삶을 기특하게 잘 살다 보면 기름진 글들이 길러져 나올 것이라 믿는다. 그런 기름진 밭에서 잠시 동안 머물고 싶은 나비 같은 이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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