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story / 에세이
운명은 타고난 것인가? 일반적으로 ‘타고난 운명’ 또는 ‘팔자가 세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운명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행동 때문에 결과가 결정된다는 인과적인 운명은 중립적 의미이고, 날 때부터 정해져 있어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숙명(宿命)은 대체로 확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파멸이나 불행으로 치닫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살아가면서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치는 경우 또는 뜻대로 뭔가 잘 풀리지 않거나, 누군가가 뒤에서 두꺼운 끈으로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순간에 ‘이것이 운명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이겨나갈 방법을 찾는 두 가지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 즉, ‘받아들여야지.’ 또는 ‘이겨낼 수 있어.’ 하면서 타협하거나,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부모를 만난 것은 타고난 숙명이다. 아내와의 만남은 의도적이었기에 필연적 운명이다.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다. 직장을 평생 다닌 것은 계획된 운명이다. 직장생활에 충실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무탈하게 좋은 학교 나와서 반려자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은 그들의 선택적 운명이다. 이런 모든 운명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노력과 희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삶에 대해서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다. 운명을 탓한 적도 없고, 불평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운명론자는 아니다. 많은 역경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순리(順理)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 기회를 피해 가면서 속으로 반문(反問)했다. ‘이것이 운명인가?’ 만약 피하지 않고 순리대로 받아들였으면 어떠했을까? 지나간 일이다. 운명은 현재지 과거가 아니다.
이제는 운명이 더 이상 오지 않을 것 같다. 운이 다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운을 찾지도 의식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냇물은 멈추지 않고, 하천으로 그리고 넓은 바다로 갈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응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운명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우리는 바로 이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 칼 구스타프 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