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이야기 /콩트
모스크바 도모데도보(Domodedovo) 공항을 빠져나오자,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둑한 밤거리는 나트륨등 불빛으로 지옥을 연상시켰다. 차창 옆으로 흐르는 모스크바강은 침묵이 흘렀다. 호텔로 들어서면서 지옥은 다시 천당으로 변했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조명과 로비에 있는 카페에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대고 있었다.
“즈드라스부이쩨(안녕하세요).”
인상이 좋아 보이는 한 여성이 다가와서 러시아말로 인사를 했다. 현지 사업을 도와줄 대학의 영문학과 교수인 A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이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였고, 단정한 외모와 이지적으로 보이는 표정이 첫눈에 신뢰감이 느껴졌다. 육감적인 몸매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러시아어가 서툰 나는 A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유창한 영국식 영어가 귀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미국식 생존 영어를 하면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A와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웨이터가 놓고 간 메뉴판은 러시아말로 되어있었다. 메뉴판만 보고 있는 나에게 그녀가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한국 음식이 그리워진다고 말했다.
“샤실릭과 솔랸카를 주문했는데, 어느 정도 입에 맞을 겁니다.”
A는 샤실릭은 양고기를 기다린 쇠꼬챙이에 꽂아서 숯불에 구운 요리이고, 솔랸카는 토마토소스와 고기로 끊인 수프라고 설명했다. 먹어보니 내 입맛에 맞았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A에게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은 판사로 근무하다가 최근에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의 5월은 한국의 5월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울창한 숲에 하얀 눈꽃이 만발했던 풍경을 지우고, 초록 물감으로 채색하고 있었다. 나와 A에게도 봄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타국에 혼자 있는 나를 토닥거려 주는 알라의 마음에 끌려가고 있었다. 현지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외로움은 눈덩이처럼 다가왔다.
“이번 주말에 모스크바강 뱃놀이 같이 갈까요?”
무료한 주말을 혼자 보내는 나를 위해 그녀가 제안했다. 그녀는 남편이 해외 출장 중이라는 말도 했다. 배는 강 하류로 서서히 움직였다. A는 양고기 바비큐에 필요한 음식들을 준비했다. 배 안의 작은 선실에는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배 앞머리에는 바비큐에 필요한 화로와 숯이 준비되어 있었다.
A는 키예프(키이우)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모스크바로 발령을 받으면서 30여 년 전 어릴 적에 이곳으로 와서 자랐다고 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낯설기도 했지만,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같이 놀아주지를 않아, 지금도 가까운 친구들이 없어요.”
유년 시절을 외로움으로 힘들게 보냈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양고기를 벌겋게 타는 숯불에 올려놓고, 보드카를 마시며 ‘다드나! (건배)’를 외쳤다. 잔을 비우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동안 내 몸속 깊숙이 잠자고 있던 애욕이 빗장을 풀고 강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모든 일은 한순간에 일어났다. 나는 그녀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면서 몸속 깊이 빠져들어 갔다.
“가족과 무슨 문제가 있나요?”
A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가족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가족에게는 문제가 없죠.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정생활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원하는 생활이 아니라, 강요된 생활이라고 했다. 이념의 강요, 체제의 강요, 그런 억압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고 했다. A는 공무원으로 살아온 아버지와 공산주의 사상에 빠진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사상이나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를 보니 부럽다고 했다. 통제된 사회에서의 답답한 일상과 자신을 억압하는 이념의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그녀를 이해할 것 같았다. A의 커다란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어느덧 모스크바강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본사로부터 한 장의 전문을 받았다.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을 정리하고, 러시아에서 철수하라는 지시였다. 모종의 프로젝트가 미국 경쟁사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곳에서 할 일은 없어졌다.
A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터질 것 같으면서, 몸에서는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들려왔다.
“깍 젤라! (안녕)”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다.
“..........”
“왜 말이 없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군요?”
그녀는 내가 생각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달려왔다. 숙소와 10분 남짓 한 거리에 있는 그녀의 집이 그날은 더욱 짧게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와락 내 가슴에 안겼다. 그녀의 가슴은 여전히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정지되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 나는 다가올 이별 때문에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그녀는 왜 우느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러시아에 온 목적이 무엇이며, 머지않아 떠날 사람이라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도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며칠 후, 나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비행기 안에서 해가 뜨는 모스크바를 보고 있었다. 몇 해 전, 나의 천사인 K와 힘들었던 이별이 떠올랐다. 다시는 볼 수 없을 A를 생각하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만 그녀에게 남기며 떠났다.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리면서 모스크바를 포근하게 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