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책을 고르던 내 손이 누군가에 부딪혔다. 손이 닿은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는데, 그 책을 잡으려던 K가 겸연쩍게 웃고 있었다.
“저랑 같은 책을 골랐네요.”
그녀의 말이 냉소적으로 들렸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보려던 책은 유명한 미국 목사의 저서인 ‘너 자신을 사랑하라.’였다. 그 책을 들고 계산대로 가는데 K가 따라와, 그녀가 먼저 계산하면서 책을 나에게 줬다. 그녀는 그 목사가 한국 부흥회에 왔을 때 참석했다고 하면서, 읽어 보면 좋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제게 책을 사주셨는데,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
K는 웃음으로 대신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K가 선물해 준 책을 단숨에 읽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J와 헤어진 후 자책하면서 긴 세월을 보냈다. 누나가 측은해 보이던 나에게 ‘짚신도 짝이 있다.’라는 말로 위로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한 상황에서 K가 미소를 띠며 나타났다. 하느님이 내게 보내준 천사 같았다.
그녀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하면서, 학교 앞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지인을 도와 아르바이트로 의류 디자인을 했다. K는 오랜 세월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교회를 다니며 사회 봉사 활동을 했다. 대학도 미션스쿨을 선택한 이유가 어머니가 졸업한 학교이기도 했지만,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학생활동을 하면서 도와준 그 학교 출신 선배 언니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졸업하면 뭐 할 예정이에요?”
생각지도 않은 K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자,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 아르바이트하는 옷가게 사장이 같은 교회에 다니는데, 졸업 후 같이 일할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네요.”
장사가 잘되면서 가게 몇 개를 대학가에 열면, 디자이너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의 어려운 집 사정이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나의 향후 계획보다는 그녀의 고민을 상의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류 사업이 전망이 있어 전공도 살리고, 그 방향으로 가는 것도 좋을 듯하네. 수출하는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그녀에게 도움이 되어줄 수 없는 처지에서 조언하기가 부담스러웠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했다.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장남으로서 집안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 했다. K도 아르바이트하던 가게가 사업을 확장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로 만나는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K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었다. 그녀에게 천사의 아우라(aura)를 볼 수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따뜻하고, 진실한 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회사는 재미있어요?‘
오랜만에 K와 저녁을 했다. 그녀는 항상 내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녀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그녀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없이 술잔을 자주 부딪쳤다.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내가 그녀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그녀는 나와 함께 긴 밤을 보냈다.
K는 항상 내 옆에서 있었고,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가졌고, 적어도 둘 사이에는 행복한 미래만 펼쳐져 있었다. 누나가 K가 다녔던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어서 나와 함께 연구실에서 몇 번 찾아갔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집에서도 K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별로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K의 어머니도 나이만 먹어가는 딸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 요즈음 그 아이 계속 만나고 있니? “
어머니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하게 들렸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가 그녀가 기독교 신자라는 말에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종교적인 문제만도 아닌 것 같았다.
K와의 관계가 깊어져 갈수록 가족의 눈치는 더욱 늘어났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K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
내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녀의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내가 어머니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거절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K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얼마 전 누님을 만났어요. “
내가 어머니에게 K를 집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하니까, 누나가 먼저 연락해서 K에게 어머니의 뜻을 전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K가 어머니와 둘이 사는 이유와 그녀의 어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K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날이 K와 본 마지막이었다.
K가 다니던 회사가 급성장해서 대기업이 되었다는 것을 가끔 신문을 통해서 일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K와 관련된 회사의 특집기사를 보았다. 종교활동을 위해서 주말에 근무하지 않는 회사로 알려진 그 회사 회장의 부인이 K라는 것을 알았다. 아르바이트했던 그 가게의 주인이 회장이었다. 그녀가 기업의 사회공헌을 위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활동 내용도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모든 고통을 치유해 줄, 하늘에서 내려 준 아우라와 함께 하얀 날개를 단 천사라 생각했다. 천사는 내가 알아채지 못해도 내 곁에 가끔 찾아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천사는 내가 있는 곳에서 몰래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면서 치유해 주고, 살며시 떠나갔다. 그 하얀 천사가 가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