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숲 일기 / 에세이
단지 내에 몇 개의 정자가 있다. 현대식 정자는 고풍스럽지도 않고 운치가 없어, 그냥 쉼터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주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여름에는 오수를 즐길 수도 있는 그런 쉼터이다. 편안해 보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편해질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오래된 마을에 여러 개의 정자를 볼 수 있다. 옆으로 개천이 흐르고, 고목(古木)에 파묻혀 있는 정자가 눈에 띈다.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고목은 마을의 수호신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폐허가 되어 갈 때, 산에서 백발노인이 내려와 나무를 심으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 고목을 마을 입구에 심어 정성스럽게 보살폈더니, 마을에 전염병이 사라졌다고 한다. 무려 800여 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이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이다. 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마시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의 모습이 장엄하다.
정자는 보호수가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고, 밤에는 열대야로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피서지로 사랑을 받고 있다. 정자의 넓은 마루에 누워 하늘을 본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흘러내린다. 800여 년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보호수에게 ‘오랫동안 이 마을을 지키느라 수고했다,’고 말을 건넨다. 보호수에 있는 잎사귀들이 갑자기 바람에 흔들린다. 조용히 눈을 감고, 8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