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억 여행을 한다. / 에세이
나는 배 선상에 있는 선베드에 누워 하늘을 본다. 죽음의 그늘이 다가오면 크루즈 여행을 떠나라고 했다. 적어도 그 여행하는 동안은 크루즈의 매력에 빠져 삶의 애착이 깊어진다. 아침에는 피곤해진 몸을 배에 맡긴 채, 바다 위에 떠 있는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지나간 즐거웠던 추억을 생각하며 잠시 시름을 잊는다. 낮에는 주변의 분주한 뭍 여행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태양이 사라질 때까지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해가 저물면 선상에는 멋있는 음악이 흐르고, 맛있는 산해진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뇌는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쇼를 보면서, 흥겨운 노래에 맞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다가와 춤을 제안한다면, 그 날밤은 '블랙잭'이 터진 날이다. 연회를 마치고, 춤을 권했던 처음 만난 그녀와 밤바다를 보며 배 난간에 기대어 달콤하게 입맞춤한다. 하얀 달이 선상을 비추며 그 빛은 그녀의 어깨를 타고 넘어오면서 환상적인 실루엣을 만든다.
따사한 햇살이 방 창가를 기웃거리면, 즐거웠던 지난밤에서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크루즈 여행은 제한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최고의 행복을 만들어 준다. 영원할 것 같은 순간들이 일시적으로 즐거운 인생으로 느껴진다. 그런 쾌락은 즐거움의 노예로 만들어 병 들어가던 육신은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착각에 빠진다. 배는 서서히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는 곳으로 항해하고 있다.
크루즈 배가 로스앤젤레스에 입항한다. 기나긴 바다 여행으로 지쳐가는 육신은 찌들어가던 삶에서 탈출을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간다. 배에서 내려 차를 타고 황량한 도로를 따라 끝없는 네바다 사막의 지평선을 달린다. 차장으로 저 멀리 나타나는 신기루를 보며 쾌락의 바다로 빠져든다. 석양이 먼 산을 불태우면서 길은 거대한 악마 소굴로 변해간다. 네바다주 경계선을 지나면서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점점 다가온다. 마음은 라스베이거스 품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화장한 많은 여인네가 그들에게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두리번거리는 시선을 감추고, 어느덧 한 여인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곳에는 수많은 슬롯머신이 유혹하는 소리를 내며, 화려하게 불을 뿜고 있다. 한 곳에서는 룰렛의 구슬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주변의 눈동자들은 그를 쫓아가고 있다. 반대편에 있는 테이블 주변에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 중에 가끔 '블랙잭'의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밤은 내 것 인양 두 팔을 올려 만세를 부른다.
창문도 시계도 없는 세상에서는 24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영혼이 죽지 않고 영원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들은 화려한 불빛에 취해 눈과 손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느려지는 눈동자는 사람들이 앉아있던 의자가 하나씩 비어 가면서, 망각했던 현실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가득했던 칩은 반대편으로 이동해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아쉬운 이별을 기다리고 있다. '혹시'라는 단어는 이미 멀어져 가고, 현실만 테이블 바닥에서 굴러다닌다.
쾌락에 지친 심신은 피폐해져서 더는 잃을 것 없는 모습으로 왔던 길을 따라 차를 타고 황량한 사막을 달리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를 뒤로하고 뜨거운 햇빛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스팔트의 길이 눈 위로 올라오고 있다. 지난밤의 즐거움도 이제는 무거워진 어깨만큼이나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 백미러로 보였던 라스베이거스의 찬란했던 야경도 감겨가는 무거운 눈꺼풀에 덮여 간다. 찌들었던 육신에서 탈출하기 위해 끝없는 지평선을 달렸던 어제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라스베이거스 문은 천당과 지옥의 문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곳을 들어갈 때는 천당이었지만, 그 문고리를 잡고 나오는 순간, 지옥으로 떨어진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지옥문에 새겨진 글귀가 생각난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라스베이거스는 말한다. 세상에 고통보다 더 좋은 쾌락은 없다고, 삶에서 허상이라는 공짜는 없다고.
크루즈 배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과거의 고통을 버리고, 다른 희망을 줄 미지의 세계로 간다. 또 다른 무엇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마지막에 나오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푸른 하늘에 갈매기가 힘차게 날갯짓하면서 날아가고 있다. 크루즈 배는 쾌락과 고통이 넘나들 듯 넘실거리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