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화. 동네잔치(2)

나는 '시고르자브르종'이다 / 연재소설

by 김창수

나는 동네잔치가 끝날 때까지 할머니 옆을 따라다녔다. 가끔 못살게 구는 개들이 다가오면 피했지만, 공격적으로 접근해 오면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거리며 대들었다. 동네에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개들이었지만,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개들로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용히 앉아있는데, 낯설지 않은 개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어릴 적에 집에서 자주 보던 아버지 같았다. 그는 점잖게 옆으로 와서 나를 핥아주었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금방 그의 행동에 익숙해졌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할머니가 저 멀리서 나에게 다가오자. 아버지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어릴 적 집에 오면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쫓아냈던 기억이 났다.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우던 강아지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 얼마나 보기 싫었을까. 엄마가 새끼 네 마리 낳자. 그중에 암놈 세 마리는 보기도 싫다고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보냈다. 다시는 암놈 키우지 않겠다는 할머니의 의지로 나만 이 집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런 엄마를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할머니는 더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뒤를 따라 집으로 향하는데, 저 멀리 산 밑으로 빨간 풍선이 내려가고 있었다. 아침에 봤던 할머니 의상의 실루엣이 불타고 있었다. 그동안 할머니와 목걸이에 끈을 매고 산책했는데, 오늘은 자유로운 상태로 걸어가고 있다.

“니 목줄 없으니까 좋제.”

할머니는 내게 목줄을 했던 것이 미안했는지 뒤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끈이 있으나 없으나 항상 할머니와 같은 거리에서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오늘은 동네잔치라 혼자 신나게 놀아서 미안테이. 니도 조만간 좋은 일 있을끼니 기둘려보레이.”

나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게 동네잔치보다 더 좋았다.


할머니가 여러 번 말했던 ‘조만간 좋은 일’이 엄마가 다시 돌아온다는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궁금해졌다. 내가 엄마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오늘 우연히 봤던 아버지와의 만남도 싫지는 않았다. 엄마가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도 없어 보이는 아버지가 야속했지만, 부모의 관계를 내가 모르고 있는 것도 많겠지. 지나간 일들은 이제 잊어버리고 할머니와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할머니는 방에서 아침에 했던 화장을 지우고, 복잡했던 옷을 벗어 정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낮에 할머니가 많은 음식 중에 맛있는 것만 골라 줘서인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종일 할머니 따라다닌다고 힘들었는지 눈까풀이 무거워졌다. 지금 시간이면 할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가져올 시간이었지만, 오늘 저녁은 점심으로 대신해야 할 것 같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할머니 방에서 아직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자장가 같이 들여왔다.

“자나? 저녁이 늦어서 미안테이. 밥 묵고 자거레이. 오늘 마이 힘들었제.”

나는 할머니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오늘 이상했던 모습의 할머니가 사라지고, 예전의 나의 할머니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 안기려고 두 발을 들었다. 할머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니는 이제 나랑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데이. 딴생각하지 말고 있거레이. 예쁜 친구 하나 만들어 줄끼니 기다리고 있으레이. 알겠제.”

나는 할머니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할머니만 같이 있어 주면 좋다. 할머니는 피곤한지 연신 하품했다. 나에게 밥을 해준다고 피곤했을 텐데, 밤늦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할머니가 있어 엄마가 없어도 슬프지 않았다.


나는 밥그릇을 비우고, 할머니 방에 불이 꺼지면서 문밖으로 나갔다. 밤에는 무서운 짐승들의 소리가 들려서 나간 적이 없었지만. 집 주변 정도는 가끔 돌아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밤늦게 나온 동네가 몇 번 나와서인지 낯설지는 않았다. 오늘 종일 동네잔치를 하느라 사람들이 피곤했는지 아직 늦은 저녁이 아니었는데도 벌써 모든 집에 불이 꺼져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오늘따라 유난히 밝았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니는 사람이 없어 내 발소리가 멀리까지 들린 것 같다.

가끔 짐승이 밭 주변을 배회하는 느낌이 들어 온몸이 위축되었지만, 이제 그러한 무서움도 견딜 수 있었다. 그 변화는 엄마가 사라진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제 내가 믿고 의지할 부모는 없다. 오늘 만났던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일 뿐이고, 그런 아버지를 왜 그리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따라다녔던 엄마는 이제 내 앞에 보이지 않고 있다. 내가 밤늦게 동네를 방황하는 이유가 아직 엄마가 살아있다는 실 가닥 같은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엄마 냄새가 코끝으로 흘러왔다. 그 냄새는 내가 태어나서 지금껏 잊어버린 적 없는 마음의 고향 같은 냄새였다. 나도 모르게 그 냄새가 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내가 동네 구석구석을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중천에 떠 있던 보름달이 저만치 멀어져 갔다. 짖어대던 동네 개들도 잠을 자는지 조용해졌다. 나는 엄마가 집으로 다니던 길의 냄새를 맡으며 닫힌 대문 옆 엄마의 통로로 들어왔다. 종일 떠들썩했던 동네는 이제 깊은 잠을 자고 있다. 할머니의 방에서 코 고는 소리가 동네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항상 할머니의 자장가 같은 그 소리를 들으며,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keyword
이전 07화7화. 동네잔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