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침대 옆 탁자에 있던 핸드폰이 떨리면서 요양원의 대표전화번호가 떴다. 스탠드를 켜자, 벽에 있는 시계는 아무런 일 없다는 듯 새벽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
나는 이 시간에 요양원에서 전화를 받은 적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면서 다급한 소리로 물어봤다.
“여기 요양원 간호사입니다. 어머니께서 갑자기 상태가 안 좋으셔서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야간 당직 간호사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며칠 전 요양원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는 손자들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웃는 모습이 무척 건강해 보였다.
요양원을 가는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도 차는 제자리에 있었다. 언덕길에 쌓인 눈이 보이자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등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어두웠던 주위가 하나둘씩 양파처럼 벗겨지고 있었다. 수 없이 방문했던 요양원이 오늘은 낯설기만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면서 갑갑함이 몰려왔다.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항상 반겨주던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 가슴에 귀를 바싹대었다. 숨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당장 응급실로 가야 한다는 말만 내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구급차 안에서 ‘혹시?’를 수없이 속으로 외쳤다. 아버지가 힘들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구급차에 타고 다른 병원으로 이송했을 때도 이렇게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의식이 없었을 때도 회복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 걸까?
“어머니 상태가 어떻습니까?
새벽 시간이라 피곤해 보이는 당직 의사에게 매달리다시피 물어봤다.
“지금 체크를 하고 있으니 대기실에서 기다리세요. 보호자가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무표정하게 말하는 의사가 야속하였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 너무 익숙해 보였다. 멀리서 동행한 요양원 간호사가 어머니의 옷을 환자복으로 갈아입히는 모습이 보였다. 축 늘어진 어머니의 몸이 당장에라도 돌아가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복받쳤다. 어머니와 눈을 맞추려 했으나 커튼이 쳐져 있었다. 오가는 의사와 간호사만이 분주할 뿐이었다. 요양원 간호사가 어머니의 옷을 건네주면서 뇌에 손상이 많이 온 것 같다고 했다. 검사 결과가 곧 나오니 조금 더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요양원으로 복귀했다.
평생 병원에 입원해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저렇게 누워있는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90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랫동안 해외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늙어 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존재라고만 생각을 했다. 매일 아침 불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래 사실 거라는 막연한 생각도 했다.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살아온 분이었다. 아파도 내색도 안 하고 잘 버텼다.
어머니가 어느 날 내게 병원을 가자고 했다. 그 이후로 어머니와 병원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가기 싫어하던 병원을 다녀온 날에는 얼굴이 밝았다. 병원에서 준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병원 가는 날은 어머니와 외식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같이 다녔던 식당은 피했다. 혹시 어머니가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혼자 먹기 미안해서 밥술을 뜨지 못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아버지의 이기적인 마음이 어머니를 부를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가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다고 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었다. 아침마다 혹시 아버지가 어머니를 불렀나 하면서 문을 열 때는 내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이미 일어나서 단정한 차림으로 불경을 낭독하다 내 모습에 활짝 웃었다. 그럴 때면 나는 들킨 내 마음을 어머니의 미소에 덮어버렸다. 아버지 산소에 갔을 때도 아직은 어머니를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다. 10여 년을 홀로 산속에서 누워있는 성질 급했던 아버지가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 산소에 자주 들려서 아직은 어머니 건강하다고 이야기를 해드렸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는 아침에 두 개의 가방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하나는 도시락이 든 보온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주머니였다.
“잃어버리지 말거레이.”
학교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양손에 어머니가 챙겨준 가방을 하나씩 들었다. 신주머니를 든 손을 올려서 흔들면, 어머니도 손을 흔들어주면서 차 조심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안 보일 때까지 그렇게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어렵게 얻은 장손 집 외동아들인 나에게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그때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가끔 다투는 것도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30대 후반의 어머니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었다. 항상 끼니 거르지 말라고 하면서 주머니에 넣어준 용돈으로 나는 분식집에서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사주었다.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꾸중을 들은 것은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집에 들어갔을 때였다.
“니 어디 갔다 왔노? 집에 전화도 없이 늦게 오면 우짜노!”
어머니가 그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혹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걱정을 했지만, 나는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자식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내가 군대 가기 직전이었다. 아버지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어머니가 꺼냈다.
“6·25 전쟁 때 네 형이 죽었제. 등에 업혀서 피난을 가던 중에 젖을 멕이려고 하는데 꼼작도 않더라. 그때는 정말 우째야 할지 방법이 없었던 기라. 병원도 갈 수 없었제, 약도 구할 수가 없었제. 우짜노! 우짜노! 하면서·····”
어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고 말했지만, 눈에는 이슬이 맺혀있었다. 잠시 천장을 보더니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둘째 애가 태어났제. 백일도 되기 전에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린 기라. 지금이야 큰 병이 아니지만, 그때에는 급사 병이라고 안 했나. 병원에도 갔었제, 어렵게 구한 약을 먹여도 봤지만, 소용없는 기라.”
어머니의 한이 느껴졌다. 그들이 죽지만 않았으면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군대 가는 것이 또 자식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잘 다녀 온나. 항상 조심하거레이.”
부모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심정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의 눈물을 그때 처음 보았다.
응급실 의사가 내게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가 왔는지도 몰랐다.
“어머니께서 뇌경색이 왔습니다.”
머리에서 뇌경색이란 단어가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70% 정도 뇌 손상이 되어 수술을 원하시면 다른 큰 병원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흔이 넘은 연세에 뇌 수술해야 한다는 말인가? 순간 어떻게 결정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보호자께서 환자의 상태에서 수술을 원치 않으시면 중환자실 입원 절차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신경과 전문의와 구체적인 상담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어머니께서 오른쪽이 마비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의사에게 수술 후 회복 가능성에 관해서 물어봤다.
“연세로 봐서는 회복을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의사는 나도 모르게 꽉 잡은 그의 팔을 빼면서 다른 환자에게 발길을 돌렸다. 간호사가 신경과 의사와 상담 시간을 알려줬다.
10여 년 전, 아버지가 구정 제사를 준비하다가 쓰러지면서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제사를 못 모시겠다고 하던 날이 기억이 났다. 제사를 끝내고 아버지를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응급실에서 아버지의 폐에 주삿바늘을 찌를 때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설 연휴라 담당 의사가 없었다. 응급실의 젊은 의사는 며칠 못 사실 것 같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이틀 후,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겨진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회복하였다. 한 달 정도 지나서 아버지는 무슨 이유인지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고 병원에서 당장 퇴원을 시켜달라고 화를 냈다. 처음에는 답답함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3개월 후 돌아가셨다. 그 3개월은 어머니와의 모진 전쟁이자 인연을 끊는 기간이 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 어머니 심부름을 다닌 적이 있었다. 집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매달 어머니가 준 봉투를 전해주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랐다. 어머니도 조심해서 전해주라고만 했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난 후, 왜 심부름을 가야 하는지 알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어머니는 누나 친구의 어머니에게 돈을 빌렸다.
내가 처음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머리를 길게 땋아서 밑으로 내린 머리와 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내 또래의 여학생을 봤다. 나는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서 견딜 수 없었다. 궁금한 나머지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그 여학생에 관해서 물어봤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나에게 장난스럽게 물어봤다.
“그 애가 마음에 드나? 공부 열심히 하면 내가 한번 자리를 만들어 주꾸마.”
어머니는 ‘공부’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 말을 나는 절대적으로 믿었다.
어느 순간부터 심부름하는 날만 오기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쥐여준 봉투를 가슴 깊이 넣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혹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몰려왔다.
“누구세요?”
한옥 대문 옆에 달린 인터폰을 누르자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심부름 왔습니다.”
대문이 열리면서 들어서자 대청마루 쪽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잘못한 게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덜컹했다.
“안녕! 어서 들어와.”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아 준 그녀는 바로 내가 보았던 소녀였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그녀와 사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제대한 후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 집도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투자자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애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투자자의 아들과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그녀를 잡을 방법은 없었다. 나 역시 당장 집안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니 요새 힘들제?”
어머니는 이미 내가 내색을 안 해도 다 알고 있었다. 며칠간 폭음을 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면서 얼마나 측은해했을까.
“견딜만해요. 나도 이제 철이 들었는지 앞으로 살 일만 생각해야죠.”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나를 본 어머니의 심정은 더욱 힘들어 보였다. 그녀가 나에게 해준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가슴에 묻고 가야 했다. 어머니가 내게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이 그녀를 보내는 마음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담당 의사와 상담 후, 어머니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하루에 한 번씩 제한된 면회 가능한 시간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환하게 비추는 형광등과 기계음 소리만 들리는 중환자실의 정적은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다가왔다. 가끔 어머니의 눈동자가 움직였으나 눈을 맞출 기회를 주지는 않았다.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어머니에게 가까이 대봤다. 불규칙하게 들려 간호사에게 물어봤다.
“어머니 상태가 어떻습니까?”
그녀에게 며칠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면회 시간이 끝나서 나가려고 하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는 그대로 누워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으면 그리고 눈을 뜨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으로 많은 사람이 들이닥쳤다. 여러 곳에 빨간딱지를 붙이고는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이 들어온 것이다. 부모님은 잠시 여행 다녀온다고 했으나 이런 상황에 대해서 말이 없었다. 당황한 나는 부모님이 있을 만한 그곳에 연락했으나 허사였다. 며칠 후, 아버지가 집으로 전화를 해서 잘 정리가 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랑 같이 계시는 거죠?”
아버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어머니를 바꿔주셨다.
“그래. 걱정 말기라. 너희들 밥도 못 해주고 미안 테이.”
어머니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어머니와 군대 생활을 제외하고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러 먹을 것을 싸서 들고 가끔 면회를 왔다. 내가 정신없이 먹는 모습을 보던 어머니의 표정이 생각이 났다. 외박을 나가면 한 상 차려서 ‘많이 묵으라’ 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자기희생을 강요하면서 아들을 애지중지했던 그런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가 가슴을 헤집고 있었다.
집이 빚으로 파산하면서 부모님과 월세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동안 누렸던 아들로서 호사는 끝이 났다. 어머니는 며칠간 식사도 안 하고 울기만 했다. 오랫동안 쌓았던 부와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졌기 때문만 아니었다. 내가 어머니 가슴에 불을 질렀다.
“어머니! 제가 앞으로 돈 벌겠습니다.”
하나뿐인 자식이 학교 중퇴하고 돈 벌겠다는데 어떤 부모가 그렇게 하라고 하겠는가. 아버지도 어머니 눈치만 보면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자칫 부부싸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남자들은 현실적이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더군다나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냉혹한 사회로 내몰겠는가. 그런데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학교를 계속 다니겠다는 나의 이기심이 발동하지를 못했다.
중환자실에서 입원실로 옮긴다고 필요한 물품을 사 오라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어제 면회 갔을 때만 해도 어머니의 회복이 걱정이었는데 기쁨이 몰려왔다. 입원실로 들어서자, 어머니는 내가 온 것을 인식하였는지 눈을 마주쳤지만, 말이 없었다. 당분간 안정이 필요하다는 담당 의사의 말이 없었으면 걱정을 했을 것이다. 2주 정도 입원해서 경과를 보면서 퇴원 결정을 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입원 후 식사를 못 해서 무척 여윈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죄책감도 들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있을 때 스스로 운동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적응을 잘했다. 평생을 독실한 불교 신자로 살아온 어머니는 오래 장수할 것만 같았다. 얼마 전만 해도 혼자서 먼 절을 다녔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오셨나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머니가 입으로 뭐라고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기력이 약해져서 말을 못 한다는 답만 돌아왔다. 다행인 것이 조금씩 눈을 뜨고 뭔가 의사를 전달하려는 어머니의 상태였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어머니와 아무런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어머니께서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 오랫동안 계시지 마세요.”
간호사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어머니와의 이별을 고하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당분간 면회도 자제해달라는 말에 창가에 보이는 풍경들이 흐릿해지며,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던 날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요양병원을 알아봐 달라고 하던 날, 나는 어머니에게 화를 냈다. 집 놔두고 무슨 병원이냐고 핀잔을 줬다. 어머니는 미리 싸놓은 가방을 들고 가자고 했다.
“그냥 병원으로 갈 테니 아무 소리 말기라.”
어머니의 단호한 말 한마디에 나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고집은 아버지가 밥상을 뒤엎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꺼내면 실행에 옮겨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조건을 달았다.
“한 달만 계시는 겁니다.”
어머니는 알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방을 들고나갔다. 평생 처음으로 어머니가 병원 생활을 했다. 아무리 아파도 내색 한번 안 하고 항상 ‘괘안테이. 이러다 낫겠제.’ 하면서 참고 살았던 어머니다. 그때는 왜 병원에 가자고 했는지 몰랐다.
요양병원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시설이 좋았다. 의사 선생이나 간호사들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들이라 마음이 놓였다. 근처에는 김대건 신부의 묘지가 있는 성지라 주위 환경도 좋았다. 여러 요양병원을 사전 답사해서 결정한 곳이었으나, 그 선택이 나중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같은 병실에 계신 분들이 좋아 보여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분들은 주말에 아래층에 있는 성당에 다녔다. 어머니는 그런 그분들을 부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몇 주가 지나면서 어머니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침대에서 낙상해 응급실에서 치료 후 다행히 회복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어머니의 불안 증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요양병원에서 나오겠다는 어머니를 다시 집으로 옮겼지만, 불안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신경정신과에서 검사를 받았으니 별문제가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다. 그 당시 ‘노인 우울증’ 증세라는 것을 말해주기만 했어도 어머니가 고생을 덜 했을 것이다. 몇 달 동안 요양보호사가 집에서 도와줬지만, 어머니의 상태는 호전이 되지 않았다. 요양보호사는 조심스럽게 이제는 집에서 보살피기 힘든 상황이니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라는 이야기를 했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어머니에게 좋은 요양원을 알아뒀으니 한번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하면서 순간 울컥했다. 어머니의 표정은 내가 평생 보면서 겪은 모습이 아니었다. 차라리 내게 욕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 자신이 몹쓸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여러 번 생각했지만, 집에서 간호하기에는 이제는 한계를 느꼈다. 아내도 아프기 시작하면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니와 며칠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렀다. 어머니가 말은 없었지만, 괘씸하고 서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요양원으로 갈기다. 그동안 어미가 고생 마이했데이.”
어머니의 한 마디는 마음 정리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입을 다문 채 눈을 감았다. 그것이 집에서 어머니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내가 결혼을 하면서 독립하자, 어머니는 집으로 오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았지만, 처음으로 집에 들른 것은 첫애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머니는 아내가 친정에서 몸 풀고 있는 동안 손녀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출산하고 잠시 창문 너머로 본 첫 손녀가 아른거렸지만, 어머니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결혼하면 며느리가 애 좀 먹겠다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아들과 며느리의 불화가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런 어머니였다.
아내는 어머니를 어려워했지만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도 못 했지만, 싫은 소리 듣기는 더욱 그랬다.
“니! 애 낳느라 욕봤데이”
어머니가 첫 손녀 출산 후 집에 방문했을 때 첫마디였다. 아내는 아무 소리 없이 아이만 바라보았다.
“애미 많이 닮았네. 이제 애도 낳았고, 애미가 되었으니 건강하게 잘 키우거레이” 어머니는 손녀를 아내에게 받아서 안아보면서 말했다. 핸드백에서 꺼낸 하얀 봉투를 아내에게 주었다.
나는 아내와 오랫동안 연애를 했다. 어머니는 아내를 처음 보자 첫인상이 너무 좋다고 했다. 아내는 말없이 항상 그녀의 본분에 충실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집안 환경에 있었던 나를 잘 돌봐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아내도 그런 어머니를 잘 모셨다.
결혼 후 몇 년간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어머니는 가끔 들려서 손녀들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평범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내게 정색하면서 화를 냈다. 처음에는 왜 그랬는지 몰랐다. 아내가 점점 화를 내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어느 날 그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는 눈치도 정말 없어! 왜 자주 오시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지만, 나중에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옆에 사는 장모가 어머니 오는 게 불편했다. 사돈 간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그 여파가 내게 온 것이다. 고민 끝에 나는 회사에 해외주재원 신청을 했다. 어머니에게 곧 해외로 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잘 다녀 온나.”
병원에서 2주간 입원 후, 요양원으로 다시 돌아온 어머니는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던 어머니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빠빠빠·····”
낯선 소리에 나는 갑자기 누가 내 머리를 내리친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오른손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말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다. 의사도 언어장애가 올 수 있다고 말했지만, 현실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아내가 어디 가느냐고 물어봤으나,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개나리가 피어 있는 요양원의 정원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눈이 갑자기 흐려지면서 그런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처음 보는 낯선 사람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당황할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눈물을 훔치고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갔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무슨 말을 했다.
“빠빠빠·····”
어머니가 신경 쓸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그러는지 계속해서 뭐라고 말을 했지만, 내 귀에는 같은 소리만 들렸다. 어머니의 낭랑했던 목소리는 이제는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점점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방에 들어서면 환하게 웃던 모습도 이제는 낯선 사람의 방문으로 여겼다. 가끔 내 모습을 보면서 반갑게 맞이하였으나, 어느새 누군가를 곰곰이 기억하는 듯했다. 손으로 뭔가를 설명하려 하지만 ‘빠빠빠’라는 말에 곧 묻혀버렸다. 그럴 때마다 내가 말 상대를 했지만, 나 역시 한계를 느꼈다. 어머니는 속상한 모습을 보이며 답답해했다. 다시 오겠다고 인사를 하면 어머니는 아이처럼 울면서 가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내 마음은 갈 길을 잃어버렸다. 그런 모습이 계속 이어지면서,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내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수십 년간 어머니의 머릿속에 선명한 내 존재가 이제는 몇 점의 자국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도 어머니에게 갔다. 항상 다니던 길은 변함이 없었다.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 보였던 길인데, 이제는 무감각해졌다. 요양원 정문을 올라가는 길도 그랬다. 뒷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만 유일하게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머니가 누워있는 침대 뒤로 보이는 숲 속에서는 가끔 다람쥐들이 갸우뚱거리며 지나쳤다.
얼마 전까지 반응하던 어머니는 나를 보면서 한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에 익숙해졌지만, 나를 인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와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힘 있던 손도 약해지면서 내 손에 의지하였다. 간호사는 식사도 잘하고 건강하다고 하였지만, 그 말은 이제 의례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 모습의 사진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형체가 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살아있는 동안 지워지지 않을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어머니와 마지막 이별을 기다리고 있다.
* 이 글을 2021년 고인이 되신 어머님께 헌정(獻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