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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숲 일기(7)

한숲이야기 / 에세이

by 김창수

19. 정자(亭子)

단지 내에 몇 개의 정자가 있다. 현대식 정자는 고풍스럽지도 않고 운치가 없어, 그냥 쉼터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주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여름에는 오수를 즐길 수도 있는 그런 쉼터이다. 편안해 보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편해질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오래된 마을에 여러 개의 정자를 볼 수 있다. 옆으로 개천이 흐르고, 고목(古木)에 파묻혀 있는 정자가 눈에 띈다.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고목은 마을의 수호신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폐허가 되어 갈 때, 산에서 백발노인이 내려와 나무를 심으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 고목을 마을 입구에 심어 정성스럽게 보살폈더니, 마을에 전염병이 사라졌다고 한다. 무려 800여 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이 도시의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이다. 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마시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의 모습이 장엄하다.


정자는 보호수가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고, 밤에는 열대야로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피서지로 사랑을 받고 있다. 정자의 넓은 마루에 누워 하늘을 본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흘러내린다. 800여 년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보호수에게 ‘오랫동안 이 마을을 지키느라 수고했다,’고 말을 건넨다. 보호수에 있는 잎사귀들이 갑자기 바람에 흔들린다. 조용히 눈을 감고, 8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20. 소음(騷音)

아파트에 살면서 운이 좋은 것 중 하나는 이웃을 잘 만나는 거다. 윗집과 아랫집은 소음으로 인해서 많은 불상사가 일어난다. 아랫집은 조심하면 별문제가 없지만, 윗집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아이들이 어리면 이런 층간 소음 문제는 심각해진다. 요즈음 소음방지 매트를 깔아서 어느 정도 충격이 완화는 되지만, 새벽과 저녁의 소음은 상당히 민감해서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불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층간 소음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자동차도로 옆에 있는 고층 아파트는 창문을 열지 못할 정도의 소음이 들린다. 심지어 빠르게 달리는 대형 화물차의 경우는 진동을 느낄 정도이다. 여름에도 창문을 닫아야 하는 심정은 누구에게 이야기도 할 수 없다. 집값에 영향이 생길 수 있으니, 쉬쉬하며 숨죽이면 살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아파트 생활을 한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알기에 절대 자동차도로 옆에 있는 아파트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종일 소음이 들리지는 않지만, 학교나 놀이터 옆에 있는 아파트도 피해야 한다. 아이들의 소리는 소프라노라서 그 파장이 굉장히 멀리 가고 더 시끄럽다. 소음 없는 세상은 없지만, 소음으로 고통을 받는 세상은 피해야 한다. 조용한 산 옆에 있는 아파트가 너무 외져서 집값이 다른 아파트와 차이가 난다고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지만, 차라리 그 잔소리가 소음보다 견딜만하다. 어느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오늘따라 경쾌하게 들려온다.


21. 벤치 (bench)

이곳에는 많은 산책 코스가 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산책로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벤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더 좋기도 했다. 먹기에 좋아 보이는 음식은 눈으로 먹지만, 대게는 한 번이면 족하다. 산책로도 발자국이 보일 정도면 땅이 푹신한 증거이다. 어느 날 그런 길에 많은 사람이 다녀서인지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벤치가 놓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꽃들도 관리하면서 뭔가 낯설어 보였다.


산책하다가 가끔 다리가 아파져 온다. 무릎이 약해지면서 나타나는 최근의 증세이다. 꾸준한 운동으로 ‘아직은’이라는 말도 이제 소용이 없다. 힘들면 쉬어가야 하는 거지. 등산할 때는 깔딱 고개를 넘기 전이나 넘고 나서 한번 쉬어가곤 했다. 이제는 평지에서도 한 번은 쉬어가야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온다. 아직은 작대기 없이 걷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위안을 삼으면서 산책을 한다.


벌써 세월이 흘러 이사 온 지 6년이 되어간다. 지금은 그런 깨끗하고 편한 벤치가 좋다. 잠시 쉬어가려고 앉아서 옆에 조경이 잘 된 꽃밭을 보며, 젊은 날의 추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벤치들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산책 인구가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책 경로도 다양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편한 보상을 받으며 산책했던 길에 누군가를 위해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벤치들을 기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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