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어버이 날을 지내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종종 아버지를 기억하며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아버지 모습을 떠올려 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참된 사랑은 보상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을 참된 사랑의 예로 들었다.
죽음은 관계의 끝이 아니다. 키르케고르의 '죽은 이를 기억하는 사랑의 실천'을 읽기 전에는 관계는 살아있는 동안의 한정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사랑의 실천'을 읽으면서, 죽은 이와의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관계는 조건적이다. 상대가 나에게 유익을 주면 감동하여 나도 더 사랑한다. 반대로, 상대가 날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면, 우리도 그에 상응하여 사랑이 식어진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조건적인 상거래 같은 관계일 뿐이다.
아기와 고인은 우리의 잠을 깨운다. 아이는 사랑과 관심을 달라고 보채서 잠을 깨우지만, 죽은 이는 나의 사랑을 요구하지도 않고 투정을 부리지도 않지만 나의 잠을 깨운다.
죽은 이를 위하여 울어라. 빛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를 위하여 울어라. 슬기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이를 두고는 그리 슬퍼하지 마라. 쉬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의 삶은 죽음보다 고약하다. 집회서 22장 11절
죽은 이와의 관계는 장례식에 일주일간 애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이와의 관계는 영원히 계속되는 마라톤이다. 집회서에서 "죽은 이를 위하여 울어라.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마라. 그는 쉬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장례식에서 울었다고 죽은 이와의 관계가 정리되는 게 아니다.
나는 아버지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심혈관질환으로 입원한 당일에 돌아가셨다. 평소, '나는 병원에 누워 있지 않을 거야.'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다행히 아버지가 계신 청주의 한 병원에 가서 형과 내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버지 사랑하고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계신 중환자실에서 병문안을 하고 병원 근처 식당에서 8시가 넘어 김치찌개인가 순두부찌개인가를 주문했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께서 임종하시니 오셔서 지켜보라고 한다. 침대에 누우신 아버지, 아무 말도 없으시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임종도 없으신 아버지께 마지막 말을 건넸다. "아버지 사랑하고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목이 메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두 방울 정도 흘러내렸다. 임종하는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와 나의 무언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벌초를 하러 아버지의 산소에 몇 번 갔다. 고향에 가면 생각나면 아버지가 계신 산소에 오른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그 정도였다.
죽음은 사랑의 끝이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여전히 효자도 아니고 무정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한 인간으로 대화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분도 한 인간이셨을 텐데. 그저 당연히 내리사랑을 하시는 부모로 여기며 살았다. 이제 아버지는 고인이 되셨다.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말을 걸어보지만 답은 없으시다. 아버지의 뒷모습, 일하시는 모습, 터벅 머리, 큰 눈, 화난 모습,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 중년이 넘어서는 얼굴도 붓고 뱃살도 나오신 모습도 생각난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행위는 가장 자유로운 사랑의 실천이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죽은 이는 나의 사랑을 요구하지도 않고, 내가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죽은 이에 대하여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죽은 이의 침묵이 무섭다는 것을 아는가? 죽은 이의 침묵은 거울과 같다. 나의 됨됨이를 그대로 투영해 준다. 죽은 이는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어린 아기가 잠을 깨우지만, 생전에 삶이 선한 고인일수록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한다.
죽은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죽은 이를 미워한다고 처벌하는 법은 없다. 죽은 이로부터 우리는 자유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가장 편안하고 자유롭고 부담이 없을 때 우리는 누구인가? 그것을 죽은 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속담이 있다. 이것이 세상사이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눈에서 보이지 않지만, 관계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참으로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그 외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거래에 불과한 관계이다.
죽은 자만큼 무력한 존재는 없다. 죽은 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완전 자유이다. 내 맘대로 하면 된다. 여기서 윤리적 선택 앞에 우리가 서게 된다. 죽은 자를 기억할 것인가, 기억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이다.
죽은 자를 기억할 것인가, 잊어버릴 것인가?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신실한 사랑이다.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년 전쯤에 돌아가신 당숙 아저씨(윤문구)가 생각난다. 68년 전에 우리 교회를 세우신 고 안용기 장로님의 얼굴과 그분이 하신 두 마디가 요즘 계속 내 마음에 맴돌고 있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역사 속에 위인들을 기억하는 것,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요즘 교회는 어린이 없는 어린이 주일을 보내고, 부모님을 먼저 보내고 이제 초고령이 되신 분들과 어버이 주일을 교회에서 보내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여전히 우리는 돌아가신 고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관계는 누가 효자 상을 줄 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는, 순수한 상태에서 내가 사랑을 맺는 방식을 드러내는 척도가 된다.
우리의 사랑이 식을 때 흔히 상대가 변했다고 변명한다. 사랑이 식은 나를 탓하지 않고 빠져나오는 교묘한 방식이다. 하지만 죽은 이는 변하지 않는다. 그대로 있다. 죽은 이와의 관계는 변명할 수 없다. 죽은 이와의 관계에서 변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죽은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기로 한 나의 선택이다.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우리 4형제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하셨다. 부모님은 충북 괴산에 계시고,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청주시에서 자취를 하면서 청주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를 나왔다. 13세 이후로 아버지와 나는 함께 살아본 적이 없다. 그 이후로 잔소리를 들어본 기억도 없다. 가끔 집에 들리면 무심하게 맞아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생전에 아버지와 나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자녀가 마음껏 공부하도록 힘에 겹도록 최선을 다하셨다. 넉넉하지 않은 생활비의 상당한 부분을 자녀의 학비와 생활비로 보내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 가까이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를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이제부터 아버지와 나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대화는 영원히 계속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