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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자유

저항, 부조리한 자유, 열

by 오르 Ohr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1장 4항 '부조리한 자유'에서 그 질문에 응답한다. 그는 삶의 본질적 무의미, 즉 ‘부조리’를 정직하게 응시할 것을 요청한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으려 하지만, 세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바로 그 충돌, 인간의 이성과 세계의 침묵 사이에서 탄생하는 긴장감이 부조리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 부조리로부터 도피하거나 해석하려 했지만, 카뮈는 달랐다. 그는 오히려 그 부조리를 인정하고 직면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인식에서 두 가지 실존적 결과가 나온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반항, 두 번째는 자유이며, 세 번째는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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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 Revolt


첫 번째 결과인 반항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다. 카뮈는 “부조리의 첫 번째 결과는 반항”이라고 말한다. 삶이 의미 없다고 해서 자살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무의미함을 안고도 끝까지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반항이다. 시지프는 그 상징이다. 그는 끝없는 바위 밀기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되, 결코 무릎 꿇지 않는다. 카뮈에게 반항은 생의 의지다. 삶은 힘겹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계속 살아내는 태도, 거짓 위로나 종교적 환상에 도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매 순간 진실하게 살아가는 자세, 그것이 바로 반항이다.



부조리한 자유 Absurd Freedom


두 번째 결과는 자유다. 부조리를 인식한 사람은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지는 절대적 의미나 종교적 목적에 매이지 않는다. 신이 없다면, 삶의 본질적인 목적도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완전한 자유가 열린다. 카뮈는 “부조리의 두 번째 결과는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방종이나 무책임한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적도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자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더욱 깊은 책임을 지게 한다. 그는 더 이상 외부의 명령이나 윤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매일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카뮈가 말하는 자유란, 의미 없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비로소 찾아오는 해방이며, 그것은 모든 선택이 가능한 열림이자 동시에 자기 삶에 대한 진지한 몰입을 요구하는 상태다.



열정 Passion


세 번째 결과는 열정이다. 반항이 인간의 자존이고, 자유가 인간의 책임이라면, 열정은 인간이 이 부조리한 삶을 끝까지 사랑하기 위한 실천이다. 카뮈는 말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내일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직시한 자만이 오늘을 더 진지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고통의 바닥에서 피어난 생에 대한 결의다.


카뮈가 말한 열정은 불타는 감정이나 낭만적 흥분이 아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정신이다.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아무런 보상도 약속되지 않은 삶을 붙드는 조용한 결단이다. 시지프가 매일 같은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한 번도 마음을 놓지 않듯이, 우리도 단조롭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일상 속에서 삶의 결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열정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 묻는다. “이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카뮈는 말한다. 그것은 죽음을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실존적 통찰이라고. 그러나 나에게 있어 그 열정은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에서 온다. 내가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다는 확신, 내가 창조자의 눈 안에 있다는 믿음, 그리고 나의 삶이 의미 없지 않다는 고요한 음성. 이것이야말로 나를 깨어 있게 하고, 사랑하게 하며, 오늘 하루를 허투루 넘기지 않게 만든다.



'제대로된 절망'을 가르치는 카뮈


삶의 의미가 사라진 시대, 사람들은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바로 이 부조리의 한복판에 우리를 세워놓고, 질문한다. “삶이 본질적으로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는 신 없는 세계에서, 절대적 가치가 무너진 곳에서, 인간이 스스로 견뎌야 할 실존의 무게를 담담히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이 질문을 읽으며 곧장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카뮈가 포착한 ‘부조리의 진실’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도달한 결론들에 대해 내적인 이의를 품는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자유는 세 가지 삶의 자세를 요구한다. 첫째는 반항이다. 인간은 의미 없는 세계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맞서 살아야 한다는 태도다. 시지프는 매일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며 그 반복 속에서도 삶을 계속한다. 둘째는 자유이다. 신이 없고, 초월적 가치가 없다면 인간은 외부의 규범 없이도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해방된 존재가 된다. 셋째는 열정이다. 죽음이 결국 모든 것을 끝낸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 충만히 살아내려는 태도. 카뮈는 이 세 가지를 통해 ‘부조리한 인간’이 오히려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키르케고르의 ‘절망의 형이상학’을 떠올린다. 키르케고르는 ‘신 앞에서의 단독자’가 되는 과정을 절망을 통과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절망은 무신론적 허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잃어버림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영적 여정이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절망은 신을 향한 도약을 위한 필연적 통로였다. 반면 카뮈는 부조리를 인식하면서도 끝내 그 너머로 도약하지 않는다. 그는 초월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초월은 비이성적인 ‘철학적 자살’일 뿐이다. 그는 이 세계 너머에 의미를 두는 그 어떤 믿음도 허위라고 판단한다.



카뮈에게 배운 것과 나의 성찰


나는 카뮈에게서 배운 것이 많다. 무엇보다 그가 보여준 정직함, 끝까지 책임지려는 인간적인 용기, 그리고 철학이 삶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자세는 존경스럽다. 그는 쉽게 도망가지 않았고, 냉소나 체념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신을 믿는 내가 배워야 할 윤리적 긴장감이기도 하다. 그가 택한 반항은 신앙 없는 세계에서의 신앙에 가까운 정렬이었다. 그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시지프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혼자 바위를 밀어올리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가 함께 해 주기를 바라는 존재다. 인간은 결국 관계 속에서만 구원받는다.


카뮈는 나에게 도전이었다. 키르케고르와의 대화에서 얻은 신앙의 깊이를 다시 질문하게 만든 철학자였다. 나는 이제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고개를 들고, 끝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삶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조차, 나는 사랑의 부르심을 들었고, 신의 손길을 느꼈다. 이것이 나의 반항이며, 나의 자유이며, 나의 열정이다. 카뮈가 머물렀던 자리에서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절망을 통과하되, 그 너머로 도약하기. 부조리를 직면하되, 거기서 끝내지 않기.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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