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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Sep 19. 2023

자전거로 제주도 한 바퀴 2

2012.01.01

<2>

- 2012년 1월 1     


눈을 떠 보니 새벽 2시 30분.

아직도 떠나지 못한 술기운에 머리가 멍하다.


차에 캐리어를 설치하고 자전거 두 대를 묶는다.

혹시나 아내가 일어날까 고양이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한다. 

그리고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펴놓고 로테를 향한 순진한 총각의 고민을 읽으며 시간을 기다린다.  

   

4시 30분.

아내를 깨우고 주섬주섬 준비해서 5시, 차를 출발한다.

단단히 화가 난 아내는 조수석에 눈을 감고 의자를 뒤로 젖힌다.

운전하지 않으면 멀미를 하는 사람인데 뒤틀린 심사를 누르며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로 진입해 화순 방향으로 열나게 달리다 문득 뭔가가 허전하다.

헬멧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에이 거기 가면 빌릴 수 있겠지.

네비는 이양에서 빠져나가라고 난리지만 그냥 보성 쪽으로 달린다.

보성녹차밭 구경을 하고 오는 길에 눈여겨보았던 길로 가고 싶어서다.      

간혹 일출을 보기 위해 바쁘게 지나가는 차 몇 대.

2012년은 아직 잠에 푹 빠져있다.

대천사건 이후로 음주 후에는 다음 날에도 운전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지은 죄가 너무 커 몇 배나 더 신경을 쓰며 운전대를 꽉 잡는다.


                                       

<3>     

7시 30분 장흥 노력항 도착.

대기하는 차들 뒤로 줄을 세우고 발권을 위해 대합실로 들어간다.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를 적고 표를 발급받는다.

캐리어에 묶어 놓은 자전거를 내려야 한단다.

배에서 차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는데, 차간 거리가 거의 없이 따닥따닥 붙이려면 차 밖으로 나온 물체가 없어야 한단다.     


자전거를 풀고 식당에 들러 아침을 해결한다.

육개장(7,000원)을 하나 시킨다. 

노란 육수에 콩나물과 토란대가 듬뿍 들어있는데 어디선가 많이 먹어본 익숙한 맛이다.

그래 임동에서 먹어본 영미오리탕 맛.

일반적으로 빨간 고추기름 대신 오리고기로 육수를 만들어 낸 듯싶다.

맥주 한 병으로 해장하는데, 아내는 화장실에 모두 반납하고 왔단다.

멀미를 한 모양인데 배를 또 타기가 너무 무섭단다.   

  

8시 승선 시작.

자전거는 배 난간에 안내원이 준 끈으로 단단히 묶는다.

이것저것 알려주다가 답답했는지, 지가 결국 다하고 만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2층 A5, 6번.

가운데 줄은 텅 비어있다.

귀청이 터질 것 같이 큰소리로 고동을 울리며 배는 출발하고, 

비어있는 가운데 자리로 옮긴다. 

    

“아침에 못 일어날 줄 알았지.” 내일로 출발을 하루 미루어야 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단다.  

집에 아이들과 통화를 하는데 싸우지 말고 빨리 화해하라고 난리다.

캔 맥주(2,000원)와 새우깡을 사 와 내미는 아내.

그렇게 우리는 화해하고 손을 잡는다. 

    

조금씩 배가 흔들리고 내 어깨에 기댄 아내의 머리가 점점 무거워진다.

시속 70km로 달리는 배는 큰 바다에 나왔는지 울렁울렁 곡예를 하며 파도를 넘고 있다.

TV에서는 “1박 2일”이 나오고 있다.

종민이는 문제를 설명하는데도 대답하는데도 답답하기만 하다.

이 깝깝한 놈아 공부 좀 해라.                                                                                                                                             

<4>     

10시 40분 성산항 도착.

잔뜩 웅크린 하늘은 얼굴빛이 잿빛이다.

거기다 빗방울도 하나둘 더해진다.

일단 나가는 것은 토요일 12시 30분 배로 예약해 둔다.

제주도민과 장흥군민은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면 할인해 준단다.

빗방울이 커지고 바람도 심상치 않다.

넉넉하게 일정을 잡아 놨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라이딩이 힘들 것 같다.     


성산포 바다가 훤히 보이는 “바다풍경”. 전복뚝배기(16,000원)

게, 새우, 바지락, 소라, 미더덕, 그리고 살아있는 전복 3개가 꿈틀거리며 맨 위에 올라앉아있다.

아내는 생 걸로 그냥 먹고 나는 뚝배기 바닥에 넣고 익혀서 먹는다.

보들보들하고 쫀득쫀득한 게 바로바로 살로 간다.

감귤 막걸리는 꼭 주스를 먹는 것 같아 완전 실망이다.

유통기간이 10개월이고 공장이 청주다. 그러니까 육지 술이라는 말이다.     

자전거를 달고 여행을 다니는 건 조금 번거로울 것 같아 숙소를 먼저 잡아야겠다.


일출봉 관광호텔(1인당 20,000원) 307호.

깨끗하고 창문으로 환하게 웃는 일출봉이 보인다.

낑낑거리며 자전거를 방에 모셔놓고 관광에 나선다.     


해안을 따라 검은 현무암 담으로 둘러쳐진 밭에는 온통 무 천지다.

쿵쿵 머리를 찌으며 엄마 젖을 빠는 아기 돼지처럼 무는 제주도의 진기를 쪽쪽 빨고 있다.

그래서 계곡의 물은 하나도 흐르지 않고 한라산은 저렇게 흰머리만 늘어가는 모양이다.     

혼인지를 들러 허브 동산이다.

허브는 향이 나는 모든 식물을 말한다나.

국화꽃처럼 허브라는 나무가 있는 줄 알았다. 무식하기도 해라.

여드름이 많은 큰딸을 위해 비누와 보습제를 구입한다.

“러브 미 텐더”가 흘러나오는 향이 가득한 농원을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아내와 나.

꼭 신혼여행을 온 것 같이 설렌다.                                                                                                                                                          

<5>     

차분한 거리, 느릿느릿 소걸음으로 달리는 차량.

주유소가 별로 없다, 길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다, 신호등이 조금밖에 없다.


1132번 일주도로를 따라 정방폭포(1인당 2,000원)로 간다.

가느다란 빗줄기 속에서도 찾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시원스럽게 내리꽂는 물줄기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한다.     

중문을 조금 지나면 안덕면에 “건강과 성 박물관”(1인당 9,000원)이 있다.

내비에서는 약 5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피부가 하얀 가로수는 빨간 열매를 훈장처럼 달고 있다. 

귀티가 자르르 흐른다.     


2시 30분.

정문을 지키는 야자수를 뽑기라도 할 모양인지 바람은 용을 쓰고 있다.

낮게 깔린 구름은 간간이 비를 뿌려대며 애월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전 세계의 성을 그림, 영화, 인형들로 표현해 놓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체험한다. 

몰래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전시실을 가득 메운 아줌마, 아저씨, 신혼인 부부들 거리낌 없다.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똑같은 모양이다.

얼굴색만 다르지 폼은 거기서 거기다.     


4시 30분.

흐린 날씨 탓인지 어둠이 빨리 내린다.

갈치회를 먹어봐야겠다.

실시간으로 아이들과 통화를 하며 찾아간 서귀포항 근처의 “칠십리 맛집”.

갈치정식 소.(60,000원) 조껍데기 막걸리 하나(4,000원).

허름한 2층 집, 손님이 하나도 없다.

이럴 땐 들어갈까 말까 갈등을 느끼지만, 강추한 집이면 뭔가 있겠지.     

갈치회가 가지런하게 누워 나온다.

겨자에 살짝 찍어 씹어 보면 눈이 확 떠질 정도의 맛은 아니지만 독특한 맛이다.

한치회, 오정어회, 굴, 새우, 회덮밥, 방어회 모두 깔끔하고 맛있다.

조껍데기는 약간 시큼한 게 내 입맛에는 아니다. 

압권은 팔뚝만 한 갈치와 무, 감자를 넣고 푹 찐 갈치찜.

약간 달달하면서도 서근서근 씹히는 무는 그냥 정신이 확 들게 한다.

칭찬이 인색한 아내도 두고두고 생각나겠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좋은 것 보고, 맛있는 것 먹었으니 이제는 긴 밤이 기다려진다.


맥주를 한 병 사 들고 자전거가 기다리는 숙소에 든다.

창문을 때리는 바람, 제발 내일은 조용히 좀 해주라.

제주도에서 첫날 밤. 

일출봉도 고개를 돌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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