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2023.10.23. 월

by 고주

도서관에 불이 켜져 있다.

적극적인 사서 선생님이기는 했지만, 출근 1시간 전에 출근한다고?

내 시집을 들고 오늘 봐야 할 시집 두 권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 문을 연다.

선생님은 안 계신다.

아이들 대여섯 명이 앉아 공부하고 있다.

입구 탁자에 사인을 할 수 있도록 출석부가 놓여있다.

그러고 보니 2층에도 자습실이 있었다.

옆 선생님께 물었더니, 일찍 오는 학생들이 조용하게 자습할 수 있도록 가능한 공간을 개방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율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책임감을 느낄 수 있도록 확인까지.

규칙을 어기면 콧물도 없이 단호하단다.

학습 분위기는 학교의 부단한 환경조성과 적극적인 학생들의 참여가 손바닥 마주치듯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각이라야 가능하다.

겨울방학 전까지 수업해 줄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었다.

내년에도 재계약할 수 있다는 꿀 같은 조건도 덤으로.

아마도 1차 공개 전형에 지원자가 없었나 보다.

사정 있는 제자와 운명처럼 딱 들어맞는 퍼즐 한 조각이 아닐까?

재공고 하면 꼭 전화해 주겠노라고 했는데, 어째 전화기가 조용하다.

참아야 한다.

비싸게 굴어야 한다.

방정맞는 손가락은 자꾸 꼬인다.

짧지만 다른 곳에도 가능 여부를 연락해 주기로 했는데.

다급하게 업고라도 갈 것처럼 사정하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느긋하다.

마지막으로 한 분이 오셔서 채용했다나.

발효를 넘어 초산이 된 된장 맛이다.

숨겨 놓은 세 번째 첩처럼 보름짜리 학교에 전화를 자존심 다 버리고 연락한다.

일단 교육청에 공고가 났으니 원서를 접수해 달란다.

알았다.

나에게 사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력풀에 올라와 있는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는 다 연락한다.

그다음은 원서를 보고서 여유 있게 선택한다.

기간이 긴 것은 젊은 친구들이 지원할 것이고, 짧은 것은 없으니 나 같은 늑돌이에게 기회도 주어지는 것이다.

일단 지원을 다 해보자, 당분간은.

세상살이 어디 내 맘대로 굴러가던가?

잠시 건방졌다.

겸손 침착 여유 긍정 낙관적 자신감 이런 단어들을 떠올린다.


휴대폰 플래시가 꺼지지 않는다.

켤 줄도 모르는데, 알아서 찾을 것이 있었나?

어찌할 수 없어 톡으로 물으니 간단한 답이 온다.

오늘은 자꾸 작아져서 어디 호주머니에라도 숨고 싶다.

정신 바짝 차리자.

너무 긴 싸움이다.

지친 아이들이 푹푹 쓰러진다.

한 달이 넘는 자습은 아무리 계획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라도 무리다.

서슬 퍼런 칼날의 섬뜩함이 없다.

연습이라도 백 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섰을 때 느껴지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머리칼이 솟는 끌림이 있어야 하는데.

하기야 이 아이들은 수능보다 면접을 더 준비한다고 했지.

영양가 없는 나만 방방 뜨고 있다.

그래도 조용하게 한 시간을 버텨준다니.

착해도 너무 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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