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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지

2023.12.05. 화

by 고주

<듣고 싶은 소리>


포장마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내려간다!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외치는

손녀의 높은 웃음소리

처음 가본 도시로 데려다 줄

기차의 기적소리

빈 가슴에서 떠내려가는 날

걷기도 불편한 아버지가

숭어 떼 튀어 오르는 바다로 나갈

뱃고동 소리

꼭 듣고 싶다 하시겠지



“형, 이번에는 못 내려가게 생겼습니다.

딸내미한테 가라고 전화했더니 독감으로 입원 중이네요.”

“나도 내년 1월 중순쯤에나 가보게 될 것 같다.”

일 마치고 밤에 내려간다는 셋째와 막둥이.

딸 둘이 맞이하는 아버지의 생신.

장손이 어떻다고 낳으려고 그 공을 들이셨을까.

딸이 최고인 것을.



<귓밥 파기>


딸내미에게 목숨을 맡기고

모로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귓속에서 귓밥 구르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슬금슬금 찾아오는

게으른 잠

할머니는 틈만 나면

귓밥 좀 파라

하셨다

아무것 없는데도

귀이개로 귀속을 빙빙

돌리곤 했다

지금 내 나이쯤 되셨던 듯

일찍 홀로 된

간이 콩알만 한

우리 할머니

그 아들의 생일날

많이 보고 싶다



학생부에 기록할 내용은 모두 정리했다.

공부한 만큼 결과가 나온 아이들은 부모님께도 자랑하고 싶겠지.

그런데 생명에 지장이 있는 녀석들도 있어 보인다고 했더니.

여기서 반 정도는 환호성과 함께 격한 호응이다.

확인 받든 받지 않든 다음 시간에 모두 수합하겠다.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내 말뜻을 알아먹기는 했을까?

택도 없는 문제를 들고 와 부분 점수 2점만 주라고 통사정을 하는 기.

결국 41점을 만들어주었다.

녀석의 얼굴에서 안도의 빛을 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지.


몇 시간이면 책 진도가 끝나게 생겼다.

통계 부분이라 책의 모든 문제를 질문하고 답하면서 나름 수업다운 수업이 되고 있는데.

손에 뭔가를 쥐여주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 공들.

되도록 천천히 꼭꼭 씹어 소화를 시키고 있다.

공부 좀 한다는 녀석들은 복장이 터진 모양이다.

이놈들아, 수업 시간에 함께 하라고.

아무리 말해도 귀에 박히지 않는 내 말.

허공에 흩어지는 아까운 내 말.

시험을 치고 나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속을 다 보여준 녀석들은 기가 좀 죽었다.

실없는 소리 했다가, 내 눈총을 맞고 바로 깨갱이다.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아져서 적응된 것인가?

그동안 속이 좀 든 것인가?

어찌 되었건, 수업하기는 훨씬 쉬워졌다.

귀여운 자식들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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