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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2024.03.07. 목

by 고주

<시험>


“어차피 영어는 에이닷”이 써진 공책을 나눠주는 젊은이.

근처의 소문난 학원에서 홍보 나온 모양이다.

롱코트에 빈이 모자를 썼다.

눈매가 날리고 얼굴이 주먹만 한 것이 나쁘지 않다.

언 손으로 공책을 내밀고 받아 가달라고 사정하는데 대부분 외면이다.

차고 넘치는 학용품인데 귀찮다는 것이지.

버리느니 안 받겠다는 확실한 깍쟁이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와 수학 선생님이다”라고 달려오는 여학생.

아마도 제대로 수업을 들은 반 아이일 것이다.

과자를 먹고 오던 녀석이 “드실래요?” 하며 내민다.

“그래, 고맙다.”

받은 캔디가 호주머니 속에서 9시까지 함께 떨고 있다.

오늘은 기초학력 진단검사가 있는 날.

1교시 국어.

컴퓨터용 수성사인펜만 남기고 책상 위를 모두 정리하라고 지시한다.

시험 면제 조건을 묻는 아이, 영어가 제일 쉽다는 그 아이.

어제 부모님 강요로 학원에 가는 것도 손을 들어야 하느냐고 뾰족하게 물었던 바로 그 아이다.

푸짐한 아래턱, 두꺼운 눈꺼풀 속에 숨은 독새 같은 눈.

말 많은 투덜이가 되거나, 크게 되어 나라를 구할 위인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책 읽어도 돼요?”

반듯하게 가르마 같은 줄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데 넘기던 시험지를 잡고 나를 쳐다보는 가시나.

눈에서 파란 불빛이 튀며 오른쪽으로 쏜다.

그 불빛이 겨냥한 목표물에는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고 있는 머슴아.

가지런하게 접힌 시험지와 답안지.

학교에서 보는 처음 시험이라 그렇겠지.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다른 책을 내놓으면 안 된다고 이른다.

아마 둘은 오래 겨루고 있는 맞수인지도 모르겠다.

자기는 반도 풀지 않았는데, 다 끝내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을 수도 있었겠다.

둘의 승부는 어떻게 진행될지 개봉박두다.


2교시 수학.

분수 계산, 백분위, 공간도형, 원주율.

어렵다.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고개를 묻고 있는 저 슬픈 뒤통수.

20분 만에 다 풀고 마지막 답을 꾹꾹 눌러 표시하는 짖은 일자눈썹, 예사롭지 않은 눈빛, 얼굴을 감싸는 형형한 기운.

둘의 앞날은 어떻게 달라질까?

10분이나 남았는데 대부분 끝낸 것 같다.

모두 100점들?

쉽다는 놈들치고 점수 잘 나오는 걸 못 봤는데.


내 머리에서는 숫자 0이 인도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아라비아로, 사막을 낙타 등에 업혀 페르시아로, 알렉산더대왕이 승전보를 울리며 마케도니아의 개선문에 들어설 때 들고 있는 창끝에 매달려, 실크로드를 넘어 중국으로 여행하는 소설이나 써 볼까 궁리로 가득하다.


점심시간.

연포탕에 조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부도 들어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실무사님들.

학교 밖으로까지 선생님들과 함께 얽히는 것은 좀 꺼려진다고.

업무의 연장 같아 싫다고.

몰래 빠지는 자전거 바퀴 바람처럼 내 귀에 들어오고 말았다.

속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밥 먹는 속도도 짬밥 그릇 수 차이가 난다.

3학년은 10분, 2학년은 20분, 1학년은 30분이 넘었어도 절반이 교실에 그대로.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운동장은 가득하다.


시험이라 점심 먹고 4교시 영어.

지하철 노선에 대해 더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았던 것 같은 윤이가 보이지 않는다.

특별반으로 옮겼단다.

싸한 바람이 구멍 난 가슴속을 지나간다.

일주일도 견디지 못했구나.

자의였을까 타의였을까?

절반이 듣기 평가다.

내 귀에도 몇 문장은 들린다.

저 녀석들은 어떻게 저렇게 바로바로 답을 찾지.

귀로 들어온 영어가 머리에서 한글로 바뀌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나.

절반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검토도 하지 않고 엎어지는 아이들.

처음 시험이라 힘들기도 했겠다.

은, 빈, 성만 남아 누가 누가 더 늦게까지 버티나 시합 중.

꼭 시험점수를 확인해 보리라.


자청한 복도순회.

2학년 복도는 바글바글 끓는 물이다.

30개의 책상이 들어가고 남은 공간이 없는 교실.

그것마저 공부하는 몇 안 되는 아이들에게 넘겨주고 나면 갈 곳은 복도뿐.

태우는 간지럼에 자지러지며 주저앉는 여학생.

너 왜 그러냐며 즐기는 저 머슴 같은 놈.

좋은 때다.

교무부장님은 순회한다는 내 말에 하시지 말란다, 단칼에.

한 달짜리가 너무 설쳤나?

내가 가고 나면 다음은 누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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