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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손잡고 1
02화
살아야지
2024.03.05. 화
by
고주
Mar 17. 2024
<살아야지>
손녀가 손가락 쫙 펴고 공룡이라 했던 발자국 따라
오늘도 나서는 길
새로 개발한 숲길로 들어선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에게도
견디다 견디다 막다른 골목에 오면
몸은 거품을 무는 것이라고,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이라고
생전 웃음을 잃지 않은 둘째 동생의 목소리를 생각한다
쉬엄쉬엄 가자
편한 후드티가 교복
잠이 덜 깬 얼굴에서 빨리 회수되는 웃음기
개나리 허리 같은 허벅지는 휘적휘적
딱 하나 책을 펴고 교문을 들어서는 신사임당 후손
빨리도 오는 특별반 아이들
교문 옆 공원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꼬맹이들
농구 골대를 향해 잠을 던지는 궁둥이 큰 3학년 아낙들
두 달 전 학교의 아이들과
익은 이름은 몇 있지만 얼굴은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
더군다나 TV에서 보는 아이돌 얼굴은 없다, 눈을 씻고 봐도 역시 없다
슬리퍼 끌며 오는 저 빨리 터지는 꽃봉오리 같은 년들, 내일 또 보자고
업무포탈 새 인증서를 등록
메신저 이름 바꾸기
내 손으로 하는 것이 맨땅에 헤딩하기여
엄한 실무사님 눈치 보며 두 손을 싹싹 비빈다
기어이 늦더라도 내 발로 걸으리라
‘학부모 학교 방문의 날’ 행사에 쓰는 유인물 작업
‘안전교육 계획’을 펴놓고 수정작업을 한다
처음 하는 일이지만 자신이 쓰임새가 있는 곳이 있다면 영광이라는
박수받을 만한 젊은이를 부장님으로 모시는 영광
백지장이라도 함께 들고 싶다
1학년 전체를 앉혀놓고 학교생활 소개를 하는데, 쥐었다 폈다 아주 혼을 쏙 빼놓는다
저것은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끼다
이 학교는 복 받았다
처음으로 하는 수업
이름을 불러보고, 내 이름과 살아온 내력을 소개하고 있는데
머리를 털고 손을 휘젓고 앉았다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는 윤이
눈앞에서 얼쩡거린다
너무 빡빡한 엄마가 짜준 일정을 소화하느라 넘어버린 아이들이
대안학교로 또는 영원히 학교를 떠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1호선을 타고 1시간 30분 동안 출근하느라 얼굴까지 마비되었다는 이야기에
자신은 9호선까지 모두 타 보았다고 눈을 맞춘다
몇 아이들은 신경이 쓰이는지 곁눈질을 한다
며칠이나 참아 줄는지
힘들면 언제든지 내게 와, 그렇게 눈으로 말해준다
강점검사
컴퓨터용 수성사인펜이 없어 검은 유성펜을 쓰는 녀석들이 뒷면까지 번진다고 난리고
여유가 있어 빌려준 아이들에게 돌려줄 때는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부족한 아이들
읽고 바로 마킹해야 하는데도 중간고사 시험 보듯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시험만 없어지면 행복해질까?
자원봉사는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우산을 쓰는 것이다라고
자발적이고 공익적이고 무보수성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교육
3교시가 끝날 때부터 기가 살아난 아이들이
운동장에 가득, 그 수만큼 도서관을 꽉 메우고
복도에서는 소리를 지르며 질주하는 물결
그래 살아야지, 꿈틀거려야지
keyword
공룡
손녀
발자국
Brunch Book
호랑이 손잡고 1
01
첫 대면
02
살아야지
03
알아가기
04
시험
05
댄스반
호랑이 손잡고 1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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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신으로 모시는 고주망태입니다. 36년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영원한 청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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