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임에도 칙칙하지 않고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그 사랑이 너무 절절해 불멸의 연애 스토리로 남은 영화. 경계를 넘어서는 안될 지도 밖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든 참고 견뎌보려 했지만 서로를 향한 강렬한 욕망은 사회적인 금기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게 하였다. 소문으로든 우연으로든 판도라의 상자를 들여다본 남편은 지옥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회적 규칙이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이유로 이들은 이미 연인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여자를 내어줄 수도, 그대로 견딜 수도 없는 남자는 아내를 태우고 사막을 건너 아내의 연인을 향해 돌진하는 자살 비행을 한다. 남이 되었던 이들은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여자를 위해 남자는 목숨 걸고 사막을 건너고 숱한 군인을 죽음으로 몰수 있는 지도를 독일군에게 넘기고 약속대로 돌아간다. 죽은 연인과 함께 국경도, 이념도, 죽음도 사라진 바람의 궁전인 사막을 향해 날아가는 두 사람.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망망대해 같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던 항공기는 격추되고 죽음을 향해 가던 남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화상 환자가 되어 야전병원을 전전하면서 끝까지 남아 자신을 간호하던 간호사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해 준다.
수년 전 이 영화를 보고 영화 장면 장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사랑이 충격적이어서 원작을 찾아 읽었는데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쯤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지 단지 그것만이 궁금해서 억지로 참고 읽었다. 영화는 그토록 재미있는데 책은 왜 별로였을까?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 이번 기회에 책과 영화를 번갈아 다시 읽고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열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열 번 읽는 게 낫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책 첫 장부터 이미 영화는 시작되었다. 피렌체 북쪽 언덕의 빌라에 모인 네 사람, 영국인 환자 알마시와 간호사 헤나. 첩보원이었던 카라바조, 폭탄 제거 공병 킵, 이 네 사람이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군상의 비극적인 면면을 보여주고 이야기는 서서히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펼치면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향해 간다. 책과 영화가 달랐던 이유는 감독과 작가가 각자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봤기 때문 아닐까? 작가가 죽고 죽이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전쟁터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고통과 피부색 다른 인종, 그들을 나누는 국경과 이념, 그 속에서 싹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썼다면 감독은 두 사람의 사랑에 포커스를 맞췄다.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열정적인 영국인 환자의 사랑과 때가 오면 물러설 줄 아는 순수한 간호사와 공병 킵의 사랑에 대하여.
이 책을 읽으면서 서은국교수의 <행복의 기원>이라는책이 떠올랐다. 작가 마이클 온다치가 과거 이천년 동안 유지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관한 정의 '목적론적 가치 있는 삶을 위한 것이 행복'이라는 인간의 철학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감독 안서니 밍겔라는 다윈의 <진화론>이래 홀딱 뒤집어진 '행복의 정의' 즉 "다윈의 진화론에 의거한 순수한 동물 본능에 의한 행복, 쾌락을 맛보기 위해, 또 그것을 바로 초기화하고 다시 맛보기 위해 생존하고 번식한다"라는 관점에 가까이 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맛있는 것을 먹는 순간,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사냥을 했는데 그 고기가 맛있었고 살과 살을 비비는 느낌이 아주 굿이어서, 인간은 그 달콤한 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존과 번식이 이루어졌다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순이라는.... <행복의기원> 을 읽고 나서 그동안 내가 가졌던 행복의 정의도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래서 금기의 사랑에 빠지고 포기하고 다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사랑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었나 보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이혼 후 영국과 캐나다에서 산 작가 마이클 온다치 자체가 다국적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원작은 92년에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 상'을 수상했고 97년에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 9개 부문 수상, 2018년에 맨부커상 50주년 기념으로 최고의 부커 상 작품들 중에서 <골든 맨부커상>에 선정되었으니 영화도 소설도 이력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원작과 다른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사흘 동안 사막을 건너가서 지프차와 의사를 데리고 세 시간 만에 돌아온다고 했던 알마시가 연합군에게 독일 스파이로 오해되어 붙잡히고 끌려다니다가 탈출해서 캐서린이 누워있는 동굴로 돌아온 것이 사흘 후가 아니라 3년 후였다는 것! 아! 원작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헤나와 킵의 순수한 사랑이 익어갈 무렵 전쟁 내내 숱한 폭탄 제거 작업을 성공리에 완수한 킵이 전쟁이 끝난 후 기쁨에 들뜬 자신의 동료 하디가 미처 제거되지 않은 부비트랩으로 죽어 나갔을 때다. 킵이 절망하면서 헤나를 떠나 전출가는데 원작에선 전쟁의 끝에 나가사키,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 소식을 들은 킵이 더 이상의 폭탄 제거가 의미 없음을 깨닫고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제거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살상 무기의 위력, 그리고 그런 폭탄은 백인 국가에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카라바조의 생각. 킵은 희망을 잃고 떠난다. 오! 역시 원작을 봐야 해!
영화와 원작 사이를 오락가락 헤매면서 간신히 줄거리를 정리하고 다시 책장을 편 순간,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시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장 한문장이 비단실처럼 섬세하고 조심스러우며 아름다워서 마구잡이로 읽어선 안되겠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감독은 이 복잡한 실타래를 어쩌면 그리도 아름답게 풀어헤쳐놨을까? 영화도 책도 너무 아름답다. 또 하나의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