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 전 고등학생일 때 이 책을 처음 만났다. 워낙 소설책 읽기를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이 책은 나의 입맛을 제대로 저격한 책이었다. 런던의 신사 록우드가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곳에 집을 얻는다. 초대도 안 했는데 부득불 폭풍의 언덕에 있는 히스클리프를 찾아간 록우드는 폭설로 인해 주인이 싫어하는데도 그 집에서 악몽 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눈 속을 헤치고 오는 바람에 병이 난 록우드는 이집의 하녀장 넬리 부인으로부터 두 집안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건 마치 내가 난롯가에 앉아 흥미진진한 천일야화를 듣는 느낌이랄까? 단 한순간도 지루할 사이 없이 세상에서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인물들의 사랑과 복수, 전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요크셔의 황량한 풍광,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와 눈 속에 핀 꽃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되풀이 읽었지만 단 한 번도 나를 지루하게 한 적이 없는 책이다.
이 책은 1847년에 나왔고 작가는 그 다음 해 1848년에 서른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당시만 해도 너무나 이상한 소설이어서 그대로 잊히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70년이 지나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언급했고 서머싯 몸이 쓴 불멸의 작가10인에 이 책이 들어가면서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어머니가 폭풍의 언덕 어언쇼가의 하녀였기 때문에 넬리는 어려서부터 어언쇼가의 아들 힌들리, 딸 캐서린과 함께 자랐다. 출장을 다녀온 아버지가 거리에 버려진 아이, 히스클리프를 집에 데려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히스클리프를 총애했고 그것을 못 견딘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학대하는데, 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세상에 없는 단짝이 된다. 아버지가 죽고 힌들리가 집주인이 되자 히스클리프는 무식한 농사꾼 하인으로 전락하고 이웃의 부유한 린톤과 가까워진 캐서린은 두 사람 사이에서 고민한다.
"저 안에 있는 고약한 인간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결혼 같은 것은 생각조차 안 했을걸. 지금 같아서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도 천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
... 나랑 히스클리프랑 결혼하면 둘 다 거지꼴이 되겠지만, 내가 린턴이랑 결혼하면 히스클리프가 잘 되도록 도와줄 수 있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 거야. ... 내가 곧 히스클리프인 거야..."
캐서린이 린톤으로부터 청혼 받았다는 사실을 넬리에게 말하며 히스클리프와 결혼할 수 없다는 얘기를 엿들은 히스클리프는 그날로 폭풍의 언덕에서 자취를 감춘다. 3년 후 캐서린은 린톤과 결혼해서 겉으론 평온한 날을 보내는데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돈도 있고 지식도 갖춘 멋진 남자가 된 히스클리프가 복수를 하겠다고 돌아오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히스클리프가 없는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의 귀향을 반기지만 뜻밖에도 린톤의 여동생 이사벨라가 히스클리프에게 반한다. 히스클리프가 복수를 위해 이사벨라와 결혼을 하고 폭풍의 언덕으로 들어와 도박을 통해 힌들리의 모든 재산을 가로챈다. 힌들리의 아들 헤아톤은 히스클리프에 의해 글자도 모르고 하인처럼 그를 위해 일만 하는 무식한 청년으로 자라는데 히스클리프는 자신이 힌들리에게 당했던 모든 고통을 헤아톤이 그대로 겪게 한다. 히스크리프의 등장으로 두 집안은 쑥대밭이 되어 힌들리도 죽고, 아이를 낳다가 캐서린도 죽는다. 그러나 자신을 학대한 어언쇼가와 자신의 사랑을 앗아간 린톤가를 무너뜨릴 마지막 삽질 한번만 하면 되는 순간 그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만다.
"시시한 결말이야, 그치? 내가 죽기 살기로 애쓴 일들이 어처구니없이 끝나버렸잖아? 두 집안을 무너뜨릴 작정으로 쇠지레니 곡괭이니 구해놓고, 헤라클레스 같은 힘을 기르려고 나 자신을 단련시켰는데, 막상 준비가 모두 끝나고 힘이 생기니까 두 집 지붕에서 기와 한 장 들어낼 의욕조차 사라져 버렸어!
내게 캐서린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뭐가 있고, 캐서린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겠어? 이 바닥만 내려다봐도 깔린 돌들이 모두 그 애 모습인데! 구름들이, 나무들이 모두 그 애 모습인데! 밤이면 사방을 그 애가 가득 채우고, 낮이면 그 애의 모습이 나를 둘러싸서 모든 것이 그 애로 보여!... 온 세상이 그 애가 한때 살아 있었지만 이제 내 곁을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는 끔찍한 비망록이야!"
흡혈귀 드라큐라가 나오는 미드를 볼 때 가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같네'라는 대사가 나온다. 난 바로 그들의 관계가 상식을 벗어난 관계라고 짐작한다. 나보다 더 나 자신이고 그 애 없는 세상은 전혀 낯선 곳이 될 것이라는 캐서린! 두 집안을 망하게 만들고 그 재산을 다 빼앗을 거지만 그 재산은 전부 캐서린, 너의 것이라는 히스클리프! 이들은 보통 상식적인 사람들이 하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 비뚤어지고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한, 그러면서 서로를 망가뜨리고야 마는 세상에 없는 그런 사랑에 나는 전율했는지도 모르겠다.
록우드가 캐서린, 린톤, 히스클리프의 그지없이 평화로운 무덤가를 거니는 마지막 장을 읽으며 문득 <구운몽>을 떠 올렸다. 사랑과 배신, 복수 그 처절한 과정을 지나면서 결국은 복수도 매듭짓지 못하고 그 재산들은 고스란히 그의 원수들인 어언쇼가와 린톤가의 후손에게로 곱게 남겨졌다. 히스크리프라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없는 미지의 인물이 평화로운 두 집안 사이에 느닷없이 끼어들어 폭풍같은 사랑과 열화같은 복수를 퍼붓지만 결국은 그는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것,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건만 그는 자신이 영원히 살줄 알았나? 물론 그건 아니었다. 복수만이 목표였는데 복수한들 캐서린 없는 세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두 집안조차도 캐서린의 한 부분이었는데 오로지 캐서린만 자신의 가슴에 담고 나머지는 다 파괴시켜야 하는 증오와 원한, 자신의 손에 들어와 있는 모든 재산이 더 이상은 그에게 가치도 없고 차라리 '아무도 물려받지 못하게 지상에서 싹 없애버려으면 좋겠지만'이라는 지경에 왔으니 아! 허무해라.
가난한 교구 목사의 딸로 태어나, 서른 살에 죽기까지 생애 대부분을 시골 목사관에서 보냈다는 에밀리 브런테. 단 한순간도 심심할 틈 없는, 주옥같은 대사와 유머가 넘치는, 동시에 광기도 넘치는 이야기를 어떻게 180년이나 지난 지금 이순간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야기로 쓸 수 있었던 것일까? 읽을때마다 감동하고 감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