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일상, 지진과 온천, 높은 산들

by 분홍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이웃 나라 대만, 세 번째 가면서야 문득 대만이 전에 자유중국이라 불리던 나라였다는 생각이 났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대만은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다. 지금은 잊힌 단어가 되었지만 한때 우리는 가까운 이웃 나라로 자유중국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공산국가로 중공이라는 단어를 썼다. 1992년 중공과 수교를 맺으면서 우리와 단절되었던 중공은 아무 때나 갈 수 있고, 볼거리가 무궁무진한 거대한 나라 중국이 되었고, 우리와 친했던 자유중국은 양국 간 단교로 한때 비행기도 오갈 수 없는 나라, 대만으로 바뀌었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딸네가 직장 때문에 대만의 타이베이로 나간 지 3년이 되었다. 이사 간 집 정리해 주러, 아이 돌봐주러 가면서 우리와는 다른 일상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놀라운 일은 지진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늘 핵무기 타령을 하는 북한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걱정하는데 막상 그 옆에 사는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과 같다. 재작년 4월, 이른 아침에 타이베이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화련 지방 타이거루 협곡에서 7.2도 지진이 났다. 견고하게 지어진 15층 아파트가 흔들흔들하더니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전등이 공중에서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13층 아파트에 있던 우리는 "어어... 어떻게 해" 하면서 비틀비틀 현관으로 달려가 막 출근하려는 사위와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 하아하아 웃었다. 싱크대 위 찬장에 넣어 두었던 양주병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진동은 멈췄다. 그 애들도 그동안 경미한 지진은 수시로 겪었지만 찬장 문이 열릴 정도의 큰 진동은 처음이었다. 사위는 출근했고 아파트 로비로 같이 내려간 딸이 괜찮은 거냐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태평하게 "노 프라블럼"이라고 했다. 아침 일찍 열리는 시장도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이 해발 1,950미터인데 남한 크기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대만에는 3천 미터가 넘는 산이 268개나 있다. 옛날부터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지각운동의 결과 엄청난 높이의 산봉우리와 언덕, 분지, 해안선이 만들어졌다. 사방에 산이 버티고 있으니 타이베이 시내에서 전철이나 택시로 삼십 분만 나가면 트레킹 할 수 있는 산이 곳곳에 있다. 도로 바로 옆에 산 입구가 있는데 다짜고짜 까마득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몇 단계 계단이 끝나면 그때부터 좁은 돌계단이 트레킹 내내 계속된다. 돌계단 외의 숲속은 대나무와 열대림으로 뒤죽박죽 엉켜 있어 들어갈 엄두도 낼 수 없는 무인지경의 열대숲이다.


아직도 뿌옇게, 유황 수증기를 뿜어대는 골짜기도 있다. 그 숲속이나 산 아랫마을에는 유황온천이 있다. 남녀 탕이 분리된 대중탕이 아니고, 대부분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는 노천온천이다. 시선 닿는 멀지 않은 곳에 울창한 숲이 있어 실내 온천 위주인 우리나라와는 또 다른 자연을 맛볼 수 있다. 지역주민만 가는 로컬 온천장에 갔더니 남녀탕이 구분되어 있고 노천이면서도 한쪽에 지붕이 있어 해를 막아주고 활짝 핀 진분홍 꽃 부겐빌레아 울타리가 시선을 끌었다. 뜨물 같은 유황 온천물이 얼마나 진한지 머리에는 비닐 캡을 쓰고 금붙이 같은 것은 다 떼어놓고 들어가야 했다.


정겹고 흥미로운 곳은 재래시장이다. 오래된 주택가 1층 사이에 차가 다니는 넓은 통로 한 구간을 일정 시간 막아놓고 이른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매일 장이 선다. 그날그날 산지에서 운반된 온갖 과일과 채소는 물론 돼지고기와 닭고기, 생선이 노점에서 팔리는데 싱싱하고 저렴하며 당연히 현금거래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방금 나온, 목판에 담긴 뜨끈뜨끈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두부와 반을 자르면 올챙이 알 같은 노란 씨주머니가 가득 들어 있는 패션 푸르트이다. 보통 백 원, 우리 돈 사오천 원이면 과일 한 무더기를 살 수 있다.


또 하나, 이들은 어린이 놀이터에 진심을 다한다. 생전 처음 보는 대형 놀이 기구들을 보며 우리나라 어린이 놀이터는 왜 이렇게 못 만들까 생각했는데 몇 번 가다 보니 이해가 된다. 땅이 좁다 보니 아파트마다 어린이 놀이터는 고사하고, 도로 옆 인도조차도 빠듯하며 쉽게 걸어 다닐 산책길도 없다. 그러니 일정 구역마다 다양한 놀이 기구와 모래 놀이터, 아이들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어른들도 쉴 수 있는 제대로 된 공원이 있어야 했다. 세월을 잊은 듯 오랜 세월 버텨와서 빌딩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반얀나무가 공원을 감싸주고 우리 동네에서는 본 지 오래된, 아이들이 바글바글 시끄럽게 뛰노는 풍경이 있다.


대만에서 3주 만에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는 영하 3도에 눈이 펄펄 날렸다. 코에 들어오는 찬바람이 상쾌했다. 영하로 내려가야만 겨울을 실감하는 내게 그들이 춥다고 하는 영상 10도의 타이베이 겨울 날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집안에 들어섰을 때 단 한 점 온기도 없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었다. 대만처럼 여름이 길고 겨울은 잠깐인 아열대 지역은 난방이라는 게 없다. 필요에 따라 히터나 라디에이터를 쓰는데 발바닥부터 따뜻하게 데워주는 온돌문화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훈기 없는 실내가 살벌했다.


겨울이 아닌 때는 태풍과 비가 잦으니 온기 말고 습기 관리가 늘 문제다. 주방이 대체로 좁은데 싱크대 위에는 대부분 식기 건조대가 있다. 식기든 빨래든 한나절 엎어놓거나 널어놓으면 물기가 싹 마르는 우리와는 달리 그릇도 일부러 건조해야 하고 빨래도 쉬이 마르지 않는다. 물론 햇빛이 쨍하면 좋은데 그런 날이 많지 않다. 며칠 걸러 비바람, 태풍 소식이다. 늘 뽀송뽀송, 반짝반짝, 햇빛이 흔전만전인 나라에 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달았다.


대만에 간 둘째 날 밤 11시쯤에 지진이 났다. 남편과 나는 갑자기 배를 탄 것처럼 흔들리는 방의 진동에 놀라 깨었다. 대만에 처음 온 남편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새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잠에 취해 있었는지 "지진인 개벼. 그냥 주무슈" 하고 잠깐 허둥대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대만 동북쪽 이란 지역 해역에서 난 7.0 지진이었다. 다음날 딸이 아빠 놀라지 않으셨냐고 걱정했고, 갑자기 심란해진 나는 이런 데서 어떻게 사냐고 물었다. 딸은 웃으면서 별거 아니라고 한다.


유치원 간식으로 잘 나온다는 달지도 않고 아삭거리기만 한 구아바를 껍질부터 씨까지 남김없이 먹는 손녀를 보면 대만 어린이가 다 되었구나 싶다. 유치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전동 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섞인 정신없이 복잡한 도로를 달려가는 딸을 보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어디서든 잘 적응하고 살면 되지, 지진까지도. 그래, 어디서든 익숙해지면 살게 마련이다.



작가의 이전글초대받지 않은 손님, 아파트 천장 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