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를 둘러싼 벚꽃나무 가지 끝이 빨긋빨긋, 뾰족한 촉을 드러내며 봄을 재촉한다. 주변 숲의 벌거벗은 나무들도 긴 겨울 견뎌내고 기지개를 켜며 움츠렸던 머리카락을 풀어헤쳐놓은 듯 부산한 모습이다. 운동화 바닥에 닿는 오솔길이 반질반질 매끄러워 맨발로 걷고 싶었다. 산길을 내려오니 황톳길, 맨발로 한번 걸어볼까. 양말 벗고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발바닥에 닿는 진흙 냉기가 써늘했다. 왜 아무도 안 걷나 했더니 축축한 황톳길은 차다 못해 아랫배까지 싸아해온다. 통증과 함께 황톳길 걷기라니? 지금 딱 이 시간, 난 뒷산 오솔길이 아니라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전쟁 났다는데 할 수 없지, 애써 포기했던 여행의 아쉬움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일흔이 되면 칠순 기념으로 이집트 여행 가자고 친구와 가볍게 약속했다. 생각해 보니 일흔 살이 뭐 별거라고 기념 여행을 가며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 마음먹은 김에 후딱 가자고 작년에 패키지 투어 예약을 했다. 받아놓은 밥상이라고 순식간에 서너 달이 지나가고, 여행 열흘 앞두고 잔금 내라고 여행사에서 문자가 왔다.
야! 우리 진짜 이집트 가나보다.
그때부터 창고에서 여행 가방을 꺼내놓고 사막에서 쓸 흰 모자와 샌들, 어깨에 맬 크로스백을 샀다. 노안으로 책 보는 게 힘들다는 친구는 유튜브를 찾아보고, 나는 부랴부랴 가이드북도 사고 도서관에서 이집트 관련 책을 빌려왔다. <방구석에서 먼저 떠나는 이집트 여행>은 12일간의 여행인데 우리 패키지 일정과 거의 똑같아서 뭐가 뭔지 모르던 이집트 여행의 맥락을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배경지식이 없으니 수박 겉 핥기 여행이 될게 뻔했다.
몇 달 전 친구와 국립박물관에서 <인상파전>을 본 김에, 근처에 있는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진행 중인 '쿠푸왕 피라미드 VR(virtual reality 가상 현실) 체험'을 했다. 그때는 쿠푸왕은 고사하고 기자의 가장 큰 피라미드가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것도 몰랐다. 쿠푸왕 VR이야말로 피라미드 내부 깊숙이, 그가 누워있었던 거대한 돌관과 사후세계를 지키던 고양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왕비의 침실까지 3D 영상으로 제대로 보여주는 건데 그때는 몰랐다. 그림 하나하나가 수억 원대인 인상파 전시는 항공운송부터 그에 따른 보험 등등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을 텐데 VR 이거야말로 거저먹기인데 입장료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전쟁기념관 지하 강당 안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VR 용 고글을 쓰는 순간, 나는 뜬금없이 기자의 대피라미드 중간 부분, 쿠푸왕 피라미드 입구에 서 있다. 레이저로 쏘아진 선안에 있는데, 그 선을 벗어나면 수십 톤의 바윗돌 피라미드 위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때문에 가상세계인 줄 알면서도 몸이 움찔움찔했다. 3차원 컴퓨터 그래픽 속 미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50분 동안, 파라오의 뒤를 따라 저승 가는 배까지 타며 숨가쁘게 고대 피라미드와 파라오의 사후 세계를 구경했다. 상상초월하는 풍경이지만 실제는 텅 빈 방에서 몇 바퀴 제자리 도는 것뿐으로, '인상파전'과 비교하면 날로 먹기 아니냐고. 무식이 용감했다. 뭘 알았다면 제대로 보았을 것을.
가이드북에 나온 고대 유적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집트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에 혹해 제일 먼저 집어 든 책은 <고대이집트 왕권 신화>였다. TV에도 나온 전자공학박사가 쓴 책이어서 신뢰가 갔고 전공과 상관없는 분야의 이집트 왕권 신화를 이렇게 두툼한 책으로 썼다는데 경외감마저 들었다. 고대 유적에 가장 많이 나오는 신, 특히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고대에서는 왕권의 신성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남매끼리의 결혼은 흔한 일이었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시스 이들 넷은 같은 형제자매였는데 결혼으로 부부가 되었다. 큰오빠인 오시리스가 막내 여동생 네프시스를 자기 아내로 착각, 같이 잤고 이것을 본 동생 세트는 형인 오시리스를 죽여 열몇 조각으로 찢어서 사방에 버렸다. 아내이자 누이인 이시스는 조각난 오빠이자 남편인 오시리스의 시체를 모아 부활시켜 호루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고대 이집트 왕권 신화의 클라이맥스는 정자 상태의 호루스가 오시리스 남근에서 이시스의 자궁으로 넘어가는 과정.... 고대 이집트에서 정액과 남근은 신성한 왕권의 전달 과정의 중심에 있었으며, 이런 맥락에서 왕권의 적법성이 결정되었다."
하아! 그동안 픽션이라고만 알고 있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역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잘 알려지지 않은 '대체 역사서'에 근거한 것으로 그들의 성행위 장면이 상당히 의미 있는 신성한 결혼 의식이었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고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을 고른 후 상식적인 범위에서 읽은 책은 기자가 발로 뛰며 쓴 <유물로 읽는 이집트문명> 이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가 있는 하이집트와 아스완, 아부심벨까지의 상이집트에 이르는 전반적이고 상식적인 역사 소개를 보면서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어서 크리스티앙 자크의 역사소설 <람세스>- 64년간 재위하면서 이집트의 황금기를 만든 람세스 2세. 아부심벨, 카르나크 룩소르 신전을 세운 위대한 왕 파라오. 살아서는 나라를 통치하고 죽어서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왕권을 잡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기서 그 유명한 람세스의 왕비 네페르타리가 나온다. 람세스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여자는 사람도 아니었던 시기에 왕비의 사후 무덤까지 만들어줬을까.
이어서 넷플릭스로 넘어왔다. 그때까지 '서부전선' 아니 '중동 아부다비공항' 하늘은 아무 이상 없었다. 넷플에서 <언노운>이라는 피라미드 발굴 비화부터 보다 보니 인간의 잠(sleep)만이 유일한 라이벌이라는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에 낚여 <고대 아포칼립스>까지 보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4천 년, 지금부터 6천 년 전에서야 인류의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는데, 그레이엄 행콕이라는 사람은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 이천 년 전 급작스러운 빙하기가 와서 인간이 건설했던 그 이전의 찬란한 문화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세계 곳곳에 남아있는 불가사의한 건축물,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것은 그 흔적을 보여주려는 그들의 메시지 혹은 묵시록이라고 한다. 2천 년 전 얘기도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류가 만 이천 년 전의 잃어버린 문명의 흔적을 찾아 연결시켜보려는 다큐멘터리인데 틈만 나면 보다 보니 시리즈 끝까지 보게 되었다.
출발 닷새 전, 안방에서 TV를 보던 남편이 물었다. 오늘 새벽에 미국이 이란 공격했다는데 괜찮은 거냐고. 마침 그날 뉴스를 못 봤던 나는 무심코 말했다.
"안 괜찮을 게 뭐지?"
우리가 탈 UAE 에티하드 항공이 아부다비공항에서 환승한다는 것만 알뿐, 이란과 얼마나 근접해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두바이와 아부다비 하늘 위로 이란의 미사일이 날아오고 그걸 격추하는 우리의 미사일 요격탄, 가성비 최고 K 방산 <천궁 2>를 자랑스러워하는 뉴스가 나왔다. 어쩌라고, 나 이집트 가야 되는데, 동네방네 소문 다 내놨고 식구들한테서는 잘 말린 이집트산 대추야자 사 먹을 노잣돈까지 받아놨는데.
출발 사흘 전, 중동 하늘의 비행기는 뜨지도 않고, 가지도 오지도 못한다더니 여행사에 취소, 환불 연락이 왔다. 생각날 때마다 던져놨던 선글라스랑 여름 옷, 튜브 고추장을 꺼내고 여행 가방을 창고에 처넣었다. 인간이 신도 될 수 있는, 이집트 파라오 이야기는 물 건너 갔다. 거실 TV와 내방 침대 사이에서 과대망상과 허장성세가 곁들여진, 나와는 먼 곳의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허우적대던 시간은 끝내야 했다.
멀리 갈 거 있나. 벚꽃 피면 우리 동네 꽃구경이나 실컷 해야지. 그나저나 얼음 박힌 황톳길 빨리 벗어나야겠다. 발 시려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