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지공 거사가 되었다. 지하철 공짜! 그동안 모임에서 지하철 무임승차로 여기저기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마디 해주었다. 얼굴은 보톡스로 50대 못지않게 하고 다니며 공짜 지하철이냐고. 친구에게 세금 내는 이는 줄고 늙은이만 늘어가는 나라에서 70도 안되어 공짜 타는 거 민망한 일 아니냐고 했더니 그동안 착실히 세금 냈고 나이 먹었다고 혜택받는 것도 없는데 그거라도 챙기라고, 왜 잘난 척이냐는 통박이 왔다. 날짜 맞춰 G-PASS 우대용 교통카드를 발급받고 나니 민망했던 마음은 사라졌고 어디든 지하철 이용을 많이 해봐야겠다고 은근히 마음먹었다. 문제는 우리 동네가 역세권이 아니라서 역까지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지하철 무임승차 한들 이미 버스비를 냈지 않은가!
이월 상품 세일이 자주 있는 야탑 NC백화점에 종종 간다. 그날도 공짜 지하철 탈까, 그냥 버스 탈까 고민하다가 자전거 타고 서현역으로 갔다. 습관대로 무심코 일반 교통카드를 찍었다. 야탑역에 내리면서 공짜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공짜도 정신 차려야 얻는다.
지하철에서 나와 현금을 찾으러 엔씨 백화점 앞 우리은행 ATM기 입구로 들어갔다. 인출기는 세 대였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맨 앞쪽 인출기 앞에 서 있던 나는 내 앞에 있던 회색 스웨터 입은 여자가 끝나자 인출기 앞으로 갔는데 가운데 칸에 온 남자가 말했다.
" 여기 만 원짜리 한 장 있어요."
바로 앞에 섰던 사람이 한 장을 덜 꺼내간 모양이다.
"창구에 갖다주시면 주인이 찾아갈 수 있어요."
옆 칸에 있던 내가 말했지만 남자는 뒤를 돌아보더니 마침 문을 나서려던 내 앞에 서 있었던 회색 스웨터에게 소리쳤다.
" 여기 만원 두고 가셨어요."
"어! 저 사람 아닌데"
내가 또 무심결에 말했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자기 볼일을 봤다. 내가 어쩌겠는가. 회색 스웨터는 고개를 갸웃하며 돈을 받았다. 돈을 찾고 나오려는데 어떤 아줌마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인출기에 만 원 두고 갔어요."
하면서. 유리 문밖을 보니 얼결에 만 원을 챙긴 회색 스웨터가 보였다. 그때까지도 이게 무슨 돈인가 반신반의하는 듯, 돈과 지갑을 손에 든 채였다. 나는 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말았다.
"저기 있어요."
만 원짜리 주인은 내 말을 듣자마자 튀어 나갔다. 나와 보니 돈 가진 회색 스웨터는 내 앞에 있는데 돈 주인은 만 원짜리 가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벌써 저 앞에 달려가고 있었다.
"저기요? 여기요!"
나는 또 쓸데없는 오지랖을 펼쳐 돈 주인을 향해 소리쳤고 회색 스웨터에게는 저 사람 거라고 말해주었다. 돈 주인이 숨을 헐떡이며 안도한 얼굴로 회색 스웨터 앞에 섰다. 지갑과 만 원짜리는 이미 가방 속에 들어갔고 회색 스웨터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저어, 깜빡 잊고 갔는데. .. 빨리 주세요."
난 내 또래의 회색 스웨터가 돈을 건네고 바로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 아니, 기분 나쁘게 왜 말을 그렇게 해요?"
" ?... 차 시간이 다 되어서.... 마음이 급하다 보니.. .. 죄송해요."
"그래도 그렇지 기분 나쁘게"
어라! 이건 뭐지? 난 그 둘 사이에 버티고 섰다. 만 원이 주인에게 돌아가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맞아요. 이분이 가져간 건 아니에요."
일단 난 회색 스웨터 편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받았을 뿐이니까. 정말 차 시간에 쫓긴 건지 돈 주인은 발을 동동 굴렀고 회색 스웨터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기분 나쁜 소리를 듣나 구시렁대면서 마지못해 만 원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셋은 바로 각자의 길로 갔다.
얼마 전 지하철을 탔는데 딱 임산부 자리 하나가 비어있었다. 임산부 타면 일어나야지 하면서 앉았다. 내가 어디에 앉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몇 정거장이 지났고 어디서 탔는지 젊은 남자가 오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 임산부 자린데요."
"어맛! 아이고 죄송해요."
나는 벌떡 일어나 다른 칸으로 도망쳤다. 회색 스웨터도 재빨리 만 원짜리를 건네고 나처럼 사라졌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났다. 동시에 문득, 만 원짜리가 혹시나 자기가 흘린 돈이 아닐까 믿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이 들었다. 늙을수록 단맛에 혹해진다고 한다. 나를 포함한 지공 거사 모두가 좋아하는 공짜라는 단맛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나이를 공짜로 먹은 것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끌리는 단맛 뒤에 오는 쓴맛을 실감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