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N잡, 과외
나의 프로 N잡러 인생의 시작점은 달동네 작은 도서관이었다. 대학생 때 봉사활동으로 시작했던 과외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첫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도 한동안 이어졌으니 나의 공식적인 첫 번째 N잡은 수학 과외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고집스럽게 중학교 수학만 가르쳤다. 고등 수학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쉬운 걸로 따지면 초등 수학이 훨씬 편했을 텐데 초등학생도 받지 않았다. 내 경험상 중학교 시절이야말로 아이의 인생에 마중물을 부어줄 수 있는 유일한 골든타임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까진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지만 고등학교에 가면 이미 머리가 굵어져 늦다. 하지만 중학생은 다르다. 이때 "어? 나도 하니까 되네?"라는 작은 성취를 맛보면 그 아이의 인생 궤적은 완전히 달라진다. 나 또한 그 시기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방향을 틀 수 있었으니까.
내 과외 철칙은 단호했다.
"엄마 손에 억지로 끌려온 놈은 안 받는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본인이 할 마음이 없는 아이는 가르치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건 딱 하나였다.
"너 지금 성적은 상관없어. 근데 진짜 바뀌고 싶은 마음은 있냐?"
그 질문에 눈을 피하지 않고 덤벼드는 아이만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어느 날 한 남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성적표를 보니 기가 찼다. 남학교 전교생 182명 중에 180등. 뒤에 있는 두 명은 아예 시험을 안 본 아이들이었으니 사실상 꼴찌였다. 심지어 수업 안 듣고 운동만 하는 운동부 아이들보다 성적이 낮았다. 말 그대로 바닥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쭈뼛거리면서도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선생님 저도... 이제 좀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요."
나는 그 녀석의 멘탈과 태도부터 개조하기로 했다.
"좋아. 나한테 과외 받고 싶으면 딱 두 가지만 약속해. 첫째 학교 수업 시간에 절대 자지 마. 둘째 수학 선생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다 받아 적어. 농담까지 전부 다."
"선생님 문제집은요?"
"문제집은 나중이야. 너 지금 수업 태도부터 글러 먹었잖아. 이 두 가지만 지키면 내가 너 책임지고 성적 올려줄게. 대신 이거 안 지키면 바로 아웃이다."
나의 전략은 단순했다. 안 하던 놈을 하게 만드는 것.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특징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교실에서의 태도가 무너져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수업 시간에 자고 선생님 말씀을 귓등으로 들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녀석은 반신반의하며 나의 무식한 미션을 수행했다. 수업 시간에 눈을 부릅뜨고 선생님의 썰렁한 농담까지 노트 귀퉁이에 적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 하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수업의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어디서 목소리를 높이는지 어떤 농담 뒤에 중요한 개념을 설명하는지 파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반 학기 만에 기적이 일어났다. 182명 중 180등이던 녀석이 무려 100등이나 치고 올라간 것이다. 성적표를 들고 온 아이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학 점수가 오른 것보다 더 값진 건 그 아이의 눈빛이었다. 패배감에 젖어있던 눈빛이 '어? 하니까 되네?'라는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그 꼴찌 소년은 지금 어엿한 간호사가 되어 치열한 의료 현장을 누비고 있다.
가끔 과외를 하다가 내가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나는 당당하게 답안지를 펼쳤다. 학생들이 "쌤 그거 못 풀어서 답지 보는 거예요?"라고 킬킬거리며 놀리기도 했다. 그럼 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꾸했다.
"야 시험은 네가 보지 내가 보냐? 난 답 좀 봐도 돼. 중요한 건 이 문제를 네가 풀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물론 모든 아이가 성공한 건 아니다. 성적이 오른 녀석도 있었고 끝내 실패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난 깨달았다. 중요한 건 내가 수학 천재가 되는 게 아니다. 내가 1타 강사처럼 화려한 스킬을 뽐내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지식을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책상 앞에 앉게 만들고 펜을 들게 만드는 페이스 메이커였으니까. 내가 잘남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너를 되게 만드는 것. 그래서 결국에는 내가 필요없어지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과외의 기술이었다.
이 깨달음은 훗날 내가 회사 일이나 여러 N잡을 할 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샐러드 가게 사장은 요리사가 아니다. 칼질도 서툴고 레시피도 외워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직원들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 줄 알고 손님들이 기분 좋게 머물다 가게 할 줄 안다. 내가 완벽한 플레이어가 아니어도 팀을 승리로 이끄는 감독은 될 수 있다.
나의 첫 N잡 과외는 나에게 N잡러로서 에너지를 쓰는 법을 가르쳐줬다. 내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이다. 그러니 내가 나서서 문제를 대신 풀어주는 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독이다. 중요한 건 그 역할을 맡은 당사자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고 어디서 빠져야 하는지. 상대를 움직여 최대의 효율을 내는 그 선과 방법을 나는 그때 조금씩 터득해갔다.